26화- 몸은 멈추라는데, 마음은 걷자고 했다.

비 오는 비에르소에서 만난 사람들

by 인생클래스

비에르소로 들어가기 전날

아침이 되니
다리까지 붓고 통증이 더 심해졌다.


하지만 함께 잠들었던 걷는 이들이
말없이 짐을 꾸리는 모습을 보자
나도 조용히 배낭을 챙긴다.


창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진통제 한 알을 삼키고
다시 길 위로 나선다.


왜 이 길을 걷는 걸까.
이 길의 매력은 무엇일까.


그토록 힘들다가도
다시 걷기 시작하면
고통은 잠시 잊힌다.


오히려 걷고 있을 때는 덜 아프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멈췄다가
다시 발을 떼려 하면
참고 있던 고통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신기한 일이다.
몸은 힘든데
마음은 다시 걷자고 한다.

아직은 새벽, 폰페라다

아직 새벽이다.


폰페라다(Ponferrada)의
가로등 불빛이 꺼지기 전
도시를 빠져나온다.


이곳은 중세에
템플 기사단이
순례자를 보호하기 위해
요새를 세웠던 도시다.


수백 년 전에도
비를 맞으며
이 길을 나섰던 사람들이 있었겠지.


그들도
다리가 아프고
마음이 흔들렸을까.

길 위에 늘어선 사람들

어제 숙소에서 만난 이들이
하나둘 출발한다.


각자 다른 곳에서 나왔지만
도로 위에서는
긴 줄처럼 이어져 함께 걷고 있다.


오늘의 목표는
37km 떨어진
루이텔란(Ruitelán).

비가 오는 날이라 쉽지 않지만
마음은 이미 그곳에 가 있다.

비에르소의 길

비 오는 평지길.

캄보나라야(Componaraya)까지는
차량 도로를 따라 걷고,
언덕을 넘으면
포도밭 사이 흙길이 나온다.


비에르소는
로마 시대부터
와인과 광산으로 먹고살던 땅이다.

흙길을 밟을 때면
늘 오래된 마을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
마음이 놓인다.


멈추기로 한 선택

비바람이 거세졌다.


결국
추천받은 숙소까지 가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다.


우회해 도착한 마을.
‘델 비에르소(Ave Fenix)’라는
작은 알베르게가 있다.


이곳은
내일 넘어야 할
오 세브레이 언덕이
폭설이나 폭우일 때
순례를 멈추고
버스로 이동해도
인정받을 수 있는 ‘문’이 있는 곳이다.


오늘은
여기서 머무르기로 한다.


비를 바라보며

계획보다 짧은 구간만 걷고 도착한 오후,

숙소 앞 야외 탁자에 앉아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떠올린다.


함께 걷는 사람들

무쵸(스페인)
해결사다.

까칠한 알베르게 주인을
단숨에 순한 양으로 만든다.


술을 좋아하고 걷는 속도는 느리지만
늘 누구보다 일찍 출발한다.
그를 보며
스페인어를 배우지 않은 걸
처음으로 후회했다.


마타인(네덜란드)
이삿짐 수준의 배낭을 메고 걷는다.
장난꾸러기지만 순수하다.
그가 웃으면
나도 모르게 따라 웃게 된다.

사훈(이탈리아)
오른 다리가 불편한데도
늘 앞서 걷는다.

아침마다
귀에 익은 이탈리아 가곡을
성악가수준으로 불러준다.

폭설 속 1,515m 고개를 넘은 날,
내가 생맥주를 대접했더니
저녁엔 전통 파스타를 만들어 주었다.

불편함보다
긍정과 부지런함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마라레또(이탈리아)
요즘 말로, 꽤 까다롭다.
혼자 요리하고 혼자 먹는다.

과자를 들고 다니지만
나누지 않는다.

순한 양 같은 흰 모자를 쓰고 걷는데
‘양의 탈을 쓴 늑대’라는 말이 떠오른다.


울프(필리핀)
비아프랑카 숙소에서
미래를 준비하며 잠시 멈춰 섰다.

스코틀랜드부터 이곳까지 걸었고,
언젠가는
부다페스트에서 시작해
3,000km를 걷고 싶다고 했다.


케시(미국, 58세)
혼자 걷기를 좋아한다.

조용하고 배려가 깊다.
나에게 세탁 방법을 알려주며
내 빨래까지 함께 돌려주고
건조기 비용을 내가 지불한다해도 받지 않았다.


말보다
듣는 쪽에 가까운 사람이다.


허스키(스페인)
비아프랑카에서
여권을 보고
나와 동갑이라며 반가워했다.


커다란 귀걸이를 하고 있었는데,
귀국하면
나도 한 번 해볼까 싶었다.


그리고 많은 한국인들
산티아고에 가까워질수록
서울 도심을 걷는 느낌이 든다.


알베르게 주인은 말한다.
"이 구간부터
한국인이 가장 많아요."
마지막 100km만 걸어도
증명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순례의 의미

생각해본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
누군가는
생각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지고,
누군가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이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남았을까?.


적지 않은 나이.
때로는
멈춰 서서
나 자신을 돌아봐야 할 때다.


이 길을 걷는 건
단순한 힐링이 아니다.


상처를 자연에 묻고,
사람을 통해 위로받고,
때로는 용서하는 시간이다.


산티아고.

성 야고보가
걷고, 가르치고,
사랑을 전하던 길.


그래서인지
이 길에서는
사람이 더 사람처럼 보인다.


우리 삶은
결국 혼자 남는 여정이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는 서로 기대며 살아간다.


그래서일까.
어느 가수가 노래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다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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