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글판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 외벽에 걸린 글판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다.
하얀 바탕 위에 단정히 새겨진 몇 줄의 문장.
그건 서울의 숨결처럼 계절마다 바뀌지만, 언제나 같은 온도를 품고 있다.
이 글판은 1991년, 교보생명 창립자 제안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처음엔 격려의 문구를 거쳐 IMF 이후 사람들의 마음에 말을 거는 문학의 공간이 되어 매 계절마다 다른 시, 다른 숨결이 그 벽을 채워왔다.
1987년부터 지금까지 광화문에서 일해오고 있다. 그래서인지 광화문글판의 역사는 내 삶의 시간표와 겹친다.
젊은 날의 설렘, 지쳐 있던 어느 겨울의 한숨,
그리고 퇴근길의 잔잔한 위로까지 그 모든 순간에 글판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문구는 고은 시인의 글이다.
"떠나라 낯선 곳으로 / 그대 하루하루의 낡은 반복으로부터."
그 한 줄은 지친 마음을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어느 날,나태주 시인의 <풀꽃>이 걸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그 문장은 마치 내 주변 사람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했다.
또 한 번,정현종의 <방문객>이 걸렸을 땐 마음이 먹먹했다.
"사람이 온다는 건 /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수많은 얼굴 속에서 한 사람을 만나는 일의 기적을 그때 처음 깊이 느꼈다.
요즘 광화문 빌딩에는 대형 LED 전광판이 하나둘 들어선다.
세련된 빛으로 거리를 채우지만, 그곳엔 단 한 줄의 온기도 없다.
'빛'은 늘 사람을 모으지만, '말'은 사람을 남긴다.
그래서일까, 나는 여전히 그 하얀 글판이 사라질까 두렵다.
나는 언젠가 이곳을 떠나겠지만,
그 벽의 문장은 오래도록 남아
광화문을 찾는 누군가의 하루를 위로해주길 바란다.
삶은 늘 바쁘고, 세상은 변하지만 한 줄의 글이 사람을 멈추게 하는 힘.
그것만큼은 잊히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