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함께 오르는 길을 배우다

오 세브레이로 에서 트리아카스텔라까지

by 인생클래스

계획을 내려놓지 못한 채

숙소에 도착하면 습관처럼 안내책자와 일정표를 펼친다.
오늘은 얼마나 걸어왔고, 내일은 얼마나 걸어여하고 언제쯤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을지,
그 다음에는 땅끝마을 피스테라(Fisterra)를 어떻게 가야 할지까지
머릿속으로 먼저 완주해버린다.


순례길에 와서조차
계획을 세우고 점검하는 나 자신이
문득 우습게 느껴진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살아왔을까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계획적으로, 철저히 점검하며 살아왔던가.

상황 되는 대로 걷고
힘들면 멈춰도 되는 길인데
몸에 밴 조바심은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물레방아 위에 올라탄 인생

노랫말 속 물레방아처럼
삶은 돌고 또 도는 것인데
나는 그 흐름을 통제하려 애쓰며
늘 위에 올라서거나
아래로 떨어질까 두려워해왔다.


때로는 꼭대기에 있었고,
어느 날은 가파르게 내려와 있었다.
그래서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이 길 위에서 다시 배운다.


과분했던 삶, 그리고 교만

돌이켜보면
지금까지의 내 삶의 궤도는 과분했다.
그리고 분명 행복했다.

그래서 혹시,
나도 모르게 교만해졌던 건 아닐까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또 하나의 울타리를 세우며

경험을 통해
사람 보는 눈이 높아졌다고
스스로를 위로해보지만,

그 경험이란 것이
때로는 누군가를 알아보게 했다기보다
누구를 믿지 말아야 하는지를 배워버린 기억일지도 모른다.


목적을 위해 누군가가 선택되고,
경고가 필요할 때
가장 먼저 희생되는 얼굴이 있다는 것.

렇게 가족이라 불렀던 자리에서
한순간에 밀려나며 깨달았다.

부당함 앞에서
모두가 내 편이 되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얼마나 쉽게 혼자가 되는지.


그래서 나는
사람을 가려보는 눈이 생겼다고 말하지만,
실은 또 하나의 울타리를
조용히 세워버렸을 뿐이다.

벽난로 앞에서 지운 이름들

그래서였을까.
라바날 숙소에서 새벽까지
벽난로 옆을 지키며
핸드폰 속 오래된 인연들을
장작불에 하나씩 던지듯
조용히 지워나갔다.


비난받을 일일지라도
이제는 인연의 끈을
조금 단순하게 하고 싶다.


기대하지 않는 관계를 선택하다

기대하지 않기에
서로에게 덜 상처 주는 관계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혹시 그 변화가
지금까지 함께했던 이들에게
쑥덕거림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왔듯
다시 그렇게 살기엔
나는 이미 많이 지쳐 있었다.


결이 다른 삶 앞에서

인연의 가지치기는
그들에 대한 실망 때문만은 아니다.

각자의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며
서로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결이 다른 인생 앞에서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언젠가는 이해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를 귀하게 대하는 연습

남의 눈치를 보며 허무해지기보다
남을 원망하지 않고,
나 자신을 귀하게 여기며
내 삶을 스스로 아름답게
채색하고 싶다.


젖은 등산화가 말해주는 것

아직까지 눈에 축축이 젖은 등산화만큼이나
온몸의 뻐근함은
어제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 언덕에서의
치열한 오름을 말해준다.

뿌연 안개와 찬바람만이
소리 없이 울고 있는 언덕을 내려선다.


혼자 오르던 언덕에서

어제 오 세브레이로를 혼자 오르며
눈이 가슴까지 카 오를때 문득 산악인들의 조난 소식이 떠올랐다.

길을 잘못 들면,
기상 하나만 틀어져도
사람은 순식간에 고립된다.


경험을 믿은 판단이
자신감이 아니라 교만이었음을
그때서야 인정하게 되었다.


함께 오르는 지혜

오 세브레이로를 오르다 벅차 내려오는 길에서
나는 다시 사람들을 만났다.


언어도, 국적도 다른 순례자들이
서로의 속도를 맞추고
눈더미 쌓인 구간에서는 손을 내밀며
말없이 합심했다.


산에서는
혼자 오르는 용기보다
함께 오르는 지혜가
더 오래 살아남는 법이라는 걸
어제 오 세브레이로가 가르쳐주었다.


선택해야 했던 마을, 트리아카스텔라

오늘 걷는 구간은
트리아카스텔라(Triacastela).
'세 개의 성'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마을은
중세 순례자들에게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이곳에서 순례자들은
산 마르틴을 거칠 것인지,
사모스(Samos) 수도원으로 내려갈 것인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점검하며
길을 선택해야 했다.

다시, 어떻게 걸을 것인가

수백 년 전의 순례자들 역시
이곳에서 혼자 걷는 한계를 느꼈을 것이고
서로의 짐을 나누며
함께 길을 정했을 것이다.


오 세브레이로에서 배운
합심의 기억을 안고
트리아카스텔라에 들어서는 지금,
이 마을은
앞으로 어떻게 걸을 것인지를
조용히 묻는 듯하다.


바이블을 내려놓다

그래서 결국
이곳까지 와서도
바이블처럼 끼고 다니던
안내책자와 일정표를
나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이제는
길이 이끄는 대로,
내 몸을
조금은 믿어보기로 한다.

다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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