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생장에서 산티아고까지, 800킬로를 걷고 남은 것들
프랑스 생장,
생장 피에드포르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800킬로의 걸음이 멈춘 밤,
대성당 근처 작은 숙소 창가에 앉아
나는 오래도록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벽난로에서는 장작이 조용히 타오르고,
낯선 도시의 겨울 공기 위로
잔잔한 샹송이 흐른다.
이제야
비로소 걸어온 시간들이
내 안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33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휴대폰 속 사진을 천천히 넘긴다.
비에 젖은 길,
끝없이 이어지던 평원,
낯선 얼굴들,
그리고 그 곁에 언제나 함께 떠올렸던 반려견 마리.
길은 분명 쉽지 않았는데,
기억은 이상하리만큼 가볍다.
마치
어제 프랑스를 출발해
오늘 이곳에 도착한 것처럼,
모든 과정이 한순간에 스쳐 지나간다.
나는
마지막 지점에 닿으면
큰 환희가 밀려올 줄 알았다.
그러나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섰을 때,
웅장한 석조 건물을 마주하고도
마음은 고요했다.
환호도, 눈물도 아닌
그저 먹먹함.
어떤 감정을 만들어내려 애쓰지 않았다.
지금 느껴지는 이 담담함이
어쩌면 이 길이 나에게 준 가장 솔직한 선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성당을 등지고 광장에 앉아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이곳이 도착지가 아니라
다시 프랑스 생장의 출발점이었으면 좋겠다는
철없는 바람이 스쳤다.
아마도
끝을 받아들이기 아쉬운
순례자의 작은 욕심일 것이다.
다음 날,
걷는 이들을 위한 대성당 미사에 참석했다.
겨울이라 순례자는 많지 않았지만,
추운 계절 긴 길을 걸어온 이들을 위해
여섯 명의 사제가 한 조가 되어
거대한 향로를 흔드는 모습은
엄숙하면서도 따뜻했다.
하늘을 가르듯 흔들리던 향 연기 속에서
나는 이 길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서로의 등을 두드려 주던 순간,
“부엔 까미노”라며 건네던 짧은 인사,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마음은 통했던 시간들.
결국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은
거리도, 의지도 아닌
사람이었음을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생장에서 출발하던 날을 떠올리면
앞에 놓인 미지의 길이 있었기에
오히려 설렜던 것 같다.
나는 그동안
정해진 길, 계획된 일정,
예측 가능한 선택 속에서
안정을 배워왔다.
하지만 이 길 위에서는
내일의 숙소도,
날씨도,
몸 상태도
장담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삶이 단순해졌다.
아침이면 걷고,
배고프면 먹고,
해가 지면 쉰다.
그 단순함 속에서
나는 나를 덜어냈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지금,
성취감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묘한 허탈함이었다.
끝났다는 안도와
이제 다시
훈련되지 않은 삶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막연한 불안.
하지만 이 길을 걸으며 배운 것이 있다면
삶 역시 걷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기쁨과 슬픔,
비와 햇살,
만남과 이별이
차례로 지나가며
결국 하나의 기억이 된다.
지금은 힘겨운 순간도
언젠가는
“그때 그런 길을 걸었지”라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하나의 장면이 될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른 어느 날,
늦은 밤
난롯가에 홀로 앉아
익숙한 음악을 듣고 있다가
문득 이 길이 떠오른다면.
그때는 좋았던 기억뿐 아니라
마음 아팠던 순간들까지도
모두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앉아 있을 것이다.
장작불이 타오르고,
샹송이 조용히 흐른다.
나는 다시
그 길 위에 서 있다.
800킬로를 걸어
도착했지만,
어쩌면 이제야
또 다른 길이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https://www.youtube.com/watch?v=kVbVKtVENu0
“Mon Amour.”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