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철이었다.
논을 달리고 있어야 할 콤바인이 가장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구부러진 길을 벗어나니 잠시 휴식하고 있는 부모님과 동네 어른들이 보였다.
‘이제 오니? 이리 와봐라.’
벌어진 종이봉투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양배추 만두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농번기 어른들은 참 먹을 시간에 아이가 지나가면 종종 간식거리를 나눠주곤 했다. 학교에서 집이 멀었음에도 버스를 타지 않았던 나는 은근히 이때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렇게 만두 몇 개를 받아들고 신나 다시 집으로 향했다.
첫아이를 임신하고 입덧에 무척이나 시달렸다. 가끔이라도 구역질이 가라앉으면 양배추 만두가 먹고 싶어졌다. 만두피는 찐빵처럼 폭신하면서도 쫄깃했다. 고기가 하나도 안 들어간 순 양배추만으로 속을 채운 만두는 한 개에 50원. 친구들과 테이블에 앉아 만두를 주문하고 종지에 간장을 덜어 만두가 나올 때까지 입맛 다셨던 시간을 떠올리니 눈물이 나도록 먹고 싶었다.
때론 혼자서 들를 때도 있었는데 주방 한편 커다란 다라 한가득 쌓여 있는 양배추 소에 놀라곤 했다. 주인 할아버지는 만드는 과정을 구경해도 된다며 주방 출입을 허락해 주시기도 했다. 분명 양배추뿐이었는데 어째서 이리도 맛있었던 걸까. 등 굽은 주인할버지의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대단해 보였다. 어느 날 친정엄마에게 물었다.
‘만두가게 할아버지 아직도 계실까?'
‘얘는 돌아가신지가 언젠데.'
향기로운 만두의 향내가 영혼 깊이 남았고 다시 먹어볼 기회는 영영 떠나버렸다.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도 어김없이 입덧이 찾아왔다. 이번엔 떡볶이였다. 하루 종일 토해내면서도 얄개분식의 떡볶이는 너무도 먹고 싶었다. 그곳은 ’응답하라 1988‘의 촬영 장소로 매우 유명해져 있었다.
처음 그 집 떡볶이를 맛본 건 중학교 때였다. 친구가 정말 맛있는 떡볶이가 있다며 나를 데리고 갔다. 남은 양념에 밥까지 비벼 먹을 정도로 무척 맛있었다. 고등학교에 가면서 분식집이 가까워져 더 자주 먹으러 갔다. 떡볶이뿐만이 아니라 라면도 기가 막히게 끓이셨던 주인 아주머니는 훗날 아이들 손 붙잡고 방문했을 때도 그대로 셨다. 맛은 그때만 못했지만 소녀시절의 풋풋한 향내가 내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
드라마에 비친 모습처럼 허름한 벽지와 옥색 식탁이 그대로 있었다면 그 맛이 났을까? 아주머니는 가게가 드라마에 출연한 계기로 사업이 잘 되어 옛 건물을 허물고 새 건물을 지으셨다. 그 시절 내가 음식과 함께 먹은 건 그때만이 가질 수 있었던 아름다움이었다.
입덧으로 예민해진 후각은 출산 후에도 미미하게 남았다. 한동안 섬유유연제를 사용하지 않았고 주방세제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났다. 어느새 큰아이가 내 키를 따라잡을 만큼 시간이 흘러 다시 아무렇지 않게 향기가 있는 제품들을 사용하고 있다.
꽁꽁 움츠리며 살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은 정말 이상했다. 사람들의 얼굴은 화가 나 보였고 세상은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하굣길에 건네받은 만두가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고 친구와 먹었던 떡볶이로 인해 맛의 신세계를 느꼈듯이, 인생의 입덧을 달래는 경험을 하며 나는 서서히 세상과 친해지고 있다.
입덧이 지나면 사랑스런 아이와 만날 수 있는 것처럼 나도 그 터널을 지나 빛을 만났다. 눈부신 빛에 적응하다 보면 빛 속에 감추어져 있던 것들이 보이면서 또 실망하고 힘들어할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곁엔 항상 만두와 떡볶이가 있음을 기억하자. 입덧은 언젠가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