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만난 사람이니까
내가 대학생 1학년, 새내기였을 때 일이야. 우리 학교에도 다른 학교처럼 필수 교양 과목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무조건 다른 학생들과 강제로 조별과제를 하는 걸 목표로 삼은 수업이었지. 어쩔 수 없이 그 수업을 듣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랑 강제로 조가 됐어.
하루는 조별과제를 위해 약속을 잡고 모였는데, 어쩌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늦게 된 거야. 그래서 한 십몇 분 동안 조원 한 명이랑 단둘이 시간을 보냈어.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입에서 아무한테도 말 못 했던 고민거리가 줄줄 새어 나오더라.
뭐, 어색해지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와서 다행이었지만. 그 사람은 내 고민에 대답할 시간도 없었지. 안도했는지 아쉬웠는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그날은 그렇게 헤어지고, 한 학기가 지나 그 수업도 끝나고, 당연하게도 우리는 다신 만나지 않았어. 학과도, 학년도 다르니까, 대학교가 중학교도 아니고 얼마나 큰데 다시 만난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지.
그때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고민해 보면, 무의식적으로도 당연히 다신 볼 일 없을 줄 알고 필터도 거치지 않고 내 마음속 깊숙이 있던 고민을 쏟아냈던 거였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까 내가 살면서 그랬던 일이 몇 번 있었더라고. 단순히 이번이 그나마 가장 연결고리가 있는 사람이었을 뿐.
요즘 들어 마음속에 응어리가 생기는 일이 많더라고. 아니, 사실 대학교에 들어온 뒤부터 막연히 내가 가지고 있던 넓은 사회에 대한 기대가 깨졌던 게 이제서야 결정화된 거겠지. 비슷비슷한 애들만 보던 초중고가 지나고 대학교에 들어오면 다양한 생각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을 볼 거라고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아니었던 것 같아.
사람들은 결국 다 똑같고,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걸까.
적당히 선하고 적당히 악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적당히 선하고 적당히 악하게 살아가다 보면 주위 사람과 자신에게 환멸감이 들 때가 생기기 마련이고,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 사이에서 뭐라도 해보려고 애쓰다 보면 지쳐 나가떨어지기 마련이니 말이야.
사족이 길었는데,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우리 모두 살아가다 보면 쌓인 게 많지 않겠냐는 얘기야. 그리고 이 쌓인 걸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체했을 때처럼 시원하게 게워내는 거라는 말이지.
그치만, 친한 사람한테, 아는 사람한테 내 마음을 시원하게 털어놓는 건 말만큼 쉽지 않잖아. 특히 상대방하고 관련된 얘기라던가. 아니면 상대방이 내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은 얘기. 가장 끔찍한 건 상대방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얘기일 테지.
그런데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다시는 안 볼 사람이라면 이런 걱정을 하나도 할 필요가 없잖아? 마치 일기장에 글을 쓰는 것과 똑같으니까. 하지만 일기장과 남에게 말을 하는 거에는 한 가지 큰 차이가 있지.
바로 들은 사람에게 생각할 거리를 준다는 거야. 아무한테도 안 보여줄 일기장은 산성지가 누렇게 삭아가며 내 생각과 함께 바스러지겠만, 아무나 내 얘기를 들어준다면, 이걸로 혹시 누군가의 삶이 조금이나마 바뀔 수도 있잖아. 이왕이면 긍정적인 쪽으로.
그래서, 나는 여기에 고민거리를 적으려고 해. 오늘 저녁은 뭘로 할까 같은 그런 고민거리 말고, 왜 저 사람은 저런 행동을 해야만 했을까 같은, 좀 더 오래가는 고민을 적으려고. 어쩌면 불만을 적어내려가는, 부정적인 감정을 죄다 집어넣은 DIY 판도라의 상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런 내용만 적을 건 아니니까.
"이런 일이 있었고, 나는 이런 감정을 느꼈고, 이 일의 이유로 나는 이런 사유들을 추측했고, 그래서 나는 앞으로 이렇게 행동하기로 했다" 같은, 좀 더 생산적인 방향의 글을 쓸 생각이니까, 혹시 얘가 어떤 얘기를 할까 궁금하다면 관심 있게 봐줘.
마지막으로 내가 너와 하는 약속이야. 주구장창 얘기했듯이, 나는 아무도 모르고, 다시는 안 볼 사람한테 내 속마음을 털어놓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거야. 그래서 난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은 문체로, 가짜 이름과 가짜 사건사고들을 담아 그 누구보다도 거짓된 글을 쓰려고 해.
하지만 거짓으로 쓴 판타지가 진심을 넣은 교훈을 담은 것처럼, 나도 이 글로 풀어낼 생각과 마음만은 진짜일 거야. 물론 겪은 일도 이름이나 자세한 내용만을 빼면 최대한 사실대로 쓸 생각이고. 하지만 가끔은 정말, 진짜로, 거짓말 하나 없이 진실을 말해야 될 때도 있겠지.
그럴 때는 괄호를 치고 "그래, 진짜로"라는 문구를 넣을 생각이야. 지금 한 번 해볼까? 나는 코로나가 터짐과 동시에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된, 묘한 고교생활을 보낸 2004년생이야(그래, 진짜로). 어차피 얘기를 하다 보면 나이대야 금방 나올 테니까, 지금 이렇게 말해도 딱히 달라질 것 없을 테니까 이걸 예시로 들어봤어.
그러니, 사실관계 빼고 다 사실인 이 글을 믿고 읽어줬으면 해. 창피하다고 진심을 거짓으로 포장하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아, 참. 초면부터 반말해서 미안해. 난 평소에 존댓말로 글을 쓰는 편이라, 문체를 숨기기 위해서는 어색하더라도 반말로, 최대한 구어체로 써보려고. 그래서 어미가 좀 어색해도 너그럽게 넘어가줬으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