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도깨비 감투라

너무나 가지고 싶어

by 김서하

벌써 9월이라니, 한 해의 2/3가 지나갔다니, 세월이 무상할 따름이네. 요즘 들어 느껴지는 세월의 무상함은 이것만이 아냐. 어릴 적 추억을 만들어준 유명 인사의 죽음도 있고, 교양 교수의 썰도 있지.


이 교수는 우리 대학교를 나왔고, 지금은 작은 교양 과목 하나를 맡고 있어. 학문의 근친교배가 어쩌니 같은 말은 덮어두고 보자면, 교수 치고는 젊은 나이에 매번 강의 시간마다 긴장하면서도 적절한 썰을 섞으며 강의해서 지루하진 않은 교수야.


그 교수가 대학생의 정신 문제에 대한 강의 중에 자신의 학창 생활을 잠시 들려줬어.

"요즘은 군기가 거의 없죠? 저 때만 하더라도 굉장히 심했거든요. 특히 우리 과가 군기가 심한 걸로 유명했었어요."

그 말대로, 우리 학과는 군기가 많이 사라졌지. 그리고 다른 학과들도 마찬가지야. 시대가 변한 것도 있고,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은 것도 있어서 군기가 많이 사라졌지.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군기를 겪은 적이 없는 건 아니야. 내가 나온 고등학교는 유서 깊은 고등학교였거든. 유서가 깊다는 말은 유서가 깊은 군기가 존재한다는 말이고, 내가 들어간 동아리는 하필 그중에서도 군기가 심하기로 유명한 동아리였어.




별별 허드렛일에 언어 폭력까지, 일이 커질 수도 있는 물리적 폭력을 제외한 온갖 군기잡기를 당한 나였지만,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어. 가소로웠거든.


그 사람을 알아보고 싶다면 권력을 줘보라는, 흔히 링컨이 했다고 잘못 알려진 로버트 잉거솔의 명언처럼, 권력은 개인의 가장 악한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지. 그리고 우리 동아리의 선배들은,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 쥐꼬리만한 권력으로 온갖 악행을 저질렀고.


그래서 단순히 1년 먼저 나보다 학교에 들어갔다는 되도 않는 이유로 나와 친구들 머리 위에 서려고 드는 그 사람들이, 난 무섭지 않았어.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곧 그마저도 사라졌지. 가소로웠으니까. 어떻게 보든 나보다 위에 있는 건 사실인 사람 상대로 어떻게 그런 감정을 느꼈냐고?


왜냐면 나는 그들을 연민했거든. 얼마나 사람이 나약하고 부족하고 불쌍하면 그런 쥐꼬리만한 권력으로 다른 사람 위에 서지 못해 안달인 걸까. 이렇게 생각하자, 힘센 선배의 폭거가 아니라 마트의 장난감 앞에서 땡깡을 부리는 꼬마애 같아 보이더라고.




그런데 나중에 내가 알게 된 진실은 더 엄청났어. 별로 하기 싫었는데 '일부러' 군기를 부렸다? 각자 역할을 나누고, 착한 선배와 나쁜 선배의 역할을 맡았다? 무슨 피고인 심문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주워섬긴 건지 어처구니가 없는 말을 내뱉더라고.


그리고 우리가 이 짓거리를 계속 이어나가기를 기대하다니. 나는 어이가 없었지. 연민의 감정조차 사라지고, 깊은 혐오감만이 남았어. 아니, 환멸감이라는 게 더 정확하겠네. 적어도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딴 걸 '필요악'이라고 스스로 정당화하다니.


무지는 악이라지만, 진짜 악에 비하면 무지는 달고 고소한 약과인 거라는 걸 그날 알았어.


그리고 내게 더 충격이었던 것은 그 군기를 받았던 내 친구들이 그걸 이어가자고, 아니 더 심하게 하자고 신나게 떠드는 모습이었던 거야. 내가 용기를 내어 군기는 없애는 게 좋지 않겠냐고 얘기하자,

"그럼 너는 ○○○ 선배처럼 '좋은 선배' 역할을 맡으면 돼!"

라고, 자신이 솔로몬처럼 최적의 해결법을 제시하는 듯이 그딴 대답을 내뱉었어.


나는 그 길로 그 동아리를 나왔어. 견딜 수가 없더라고. 그걸 겪으면서 참는 거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참상을 막지 못한 채 옆에서 "엄근진"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불행을 바라보는 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인가봐.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참 많더라. 자신들이 무슨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인 양 한 살 어린 사람들을 상대로 "요즘 것들은" 운운하는, 쥐꼬리에 매달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짜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이 그런 얘기를 해도 그렇게 얘기하면 어이가 없을 텐데, 1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모든 불만을 쏟아내는 그 모습은 얼마나 꼴이 흉하겠어.




그래서 이 교수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강의는 뒷전으로 하고 백일몽에 빠졌어. 왜 사람들은 나이를 가지고 갑질을 할까? 이건 단순히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동양의 문제가 아냐. 인간의 문제지.


그렇게 위아래가 없다는 나라들도, 신입들을 갈구는 풍습도, 나이든 사람의 갑질도, 윗사람을 향한 존댓말은 다 있어. 우리 게 유독 눈에 띄어서 그렇지.


쥐꼬리만한 권력을 붙잡고 도저히 놓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걸까. 여기든 거기든 다 사람 사는 곳이라는 걸까. 왜 이토록 우리는 나이에 집착하는 걸까.


나이의 권위는 나이가 곧 지식과 지혜이던 과거로부터 내려져 온 거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이가 들면서 쌓이는 것은 지식과 지혜가 아냐. 부와 권력이지. 나이와 함께 쌓인 부와 권력이, 상관 관계에 있는 나이에도 권위를 부여한 거야. 그리고 이게 과거로부터 내려져 온 거지.


그리고 나이에는 부도, 권력도, 하다 못해 신분도 가지지 못한 장점이 있어. 절대로 잃어버릴 수가 없는 권위라는 장점이야. 영원한 권력은 없고, 부도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으며, 신분마저도 불변한 것은 아닌데, 나이만은 절대로 남이 빼앗을 수 없는 권위야. 사람은 젊어질 수 없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토록 나이에 집착하는 게 아닐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말이야.


내가 나이에 집착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나이가 많은 사람을 비판하는 게 아냐. 젊은 꼰대라는 말처럼, 아무리 작은 권력이라도 필사적으로 탐하는 것은 나이가 든 것과는 관계 없는 거니까. 오히려, 나는 나이든 사람보다 젊은 사람한테 나이를 이유로 한 갑질을 더 당한 것 같아. 아무래도 더 자주 접하니 그런 거겠지.




뭐, 이쯤이면 이러이러한 문제는 저러저러하게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내 나름의 해답을 내놓을 차례지만, 인간에게 권력을 추구하지 말라고 하는 게 쉬운 일인가. 그래도 여기까지 뱉은 말이 있으니 어떻게든 끝은 맺어야겠지.


나이는 쥐꼬리만한 권력이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쥐꼬리야. 그런 만큼 탐스럽기도 하지. 나이를 무기로 삼아 자신을 지키려는 사람은, 모든 무기는 남을 상하게 하면서 자신을 지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해.


나이 그 자체는 당연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아니, 오히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소외감과 과거를 향한 향수가 깊어지니 나쁘다고 볼 수 있겠네. 몸이든 뇌든 건강도 나빠지고.


어쨌든, 그런 단순한 자연 현상인 나이를 가지고 급을 나누고, 남을 옭아매고, 독을 뿌리는 짓은 그만하자고. 나이는 투명한 도깨비 감투여서, 쓴 사람이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감투를 쓴 것처럼 행동하게 만들지. 진짜 감투를 쓰더라도 해선 안 되는 짓을 가짜 감투를 쓰고 하진 말자고.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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