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상실을 준비하며

나는 지금 상실하고 있는 중이다

by 수필천편

12월. 탁상달력에 아내의 생일 표시가 되어있다.

아내가 말한다. "내 생일은 여름이야."


아내가 증거를 제시한다.

탁상 달력을 넘긴다. 7월. 아내 생일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그것도 버젓이 내 글씨로 하트까지 그려가면서 써 놓았다.


기억의 상실이 일상과 상상을 섞어 놓은 채 전혀 다른 것을

기정사실처럼 여기면서 혼자만의 뒤틀린 머릿속의 나이테를

채우고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어둠 속에서

걷는 기분이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서로 나누는 이야기와 시간이

갈수록 차고 넘칠 만큼이나 물음표 투성이로 바뀌어 버린다.

몇 분 지나지 않았던 이야기를 아내가 다시 묻는다.

"내가 뭐라고 그랬지?"

"........"

대답을 할 수 없다. 이 정도면 소통 불능이다. 나 자신에게도

의문을 떠올리지만, 기억들이 오류를 불러일으키며 머릿속이

헝클어지듯 많은 생각들이 뒤엉켜버린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기억의 탄력과 모든 사고의 뿌리들이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다.


결국 계속해서 기록하는 것만이 내 살 길이다. 눈과 귀를 믿지 말고

기억조차 다시 의심하면서 노트에, 달력에 쓰인 기록만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만 쓰인 기록마저도 오류가 있다면

발 디딜 곳 하나 없는 암흑천지가 아닐까.


끊임없이 생각해 보고, 수없이 떠올려보고, 반복하며

기록해 가면서 과연 맞는지 하루하루를 확인하는 것이

제대로 된 길이다.


어두운 밤이 햇빛에 물러나고 밤새 감겼던 눈이 열리며

닫힌 입술이 벌어지는 시간이 다시 시작된다. 햇빛이

환하게 떠오르듯 내 기억들의 모든 굴곡들을 환하게 비추며

또 깨어난 오늘의 하루를 살아가고 싶다.


모든 이들이 늘 살아가는 그 평범한 하루를, 같은

발걸음으로 박자를 맞추며 살아가고 싶다.

햇빛이 창을 통해 환하게 비쳐오듯 내 머릿속도

환한 하루가 되기를 마음속으로 되새김질을 하여본다.


천천히 하나씩 기억하고,

그 기억을 하나씩 떠올리고,

햇빛 내리쬐는 환한 빛으로

내 머릿속을 비추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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