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늦가을 이른 아침 바삐 길을 나선다.
찬 기운이 늦가을이 깊어짐을 가리키고 있다.
늘 이 시간이면 이른 아침 산길을 걸어가지만.
오늘은 오랫동안 가지 않은 낯설어진 길목에서
찬바람 들이키며, 낯설어진 길을 걸음을 떠올리며
아내와 함께 걸어가고 있다.
까마득한 기억이 머릿속의 길을 떠올리며
뇌 속의 길을 꺼내어 확인하고 있다. 낯선 길,
발길이 주춤거리며 주변을 빠르게 훑어간다.
목적지는 대학 병원이다. 몇 개월에 한 번씩
복용할 약을 처방받으러 가는 것이다.
진료실에 들어가니 의사의 표정이 익숙하다.
잘 지내느냐는 의례적인 의사의 인사말에
잘 지내고 있다는 내 대답 한마디로 사실상의
진료는 끝나버린 셈이다.
그런데 아내가 랩을 하기 시작했다.
그 짧은 시간에 아내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어필하느라고 숨 쉴 틈도 없이
내 자랑을 쏟아 냈다.
내 핸드폰까지 의사에게 보여주면서
그동안의 증거를 제시하는 듯했다.
필사적으로 달라붙는 아내 와는 달리
의사는 그저 형식적으로 '네, 네'
할 뿐이었다.
의사도 자신의 처방만 되풀이 말할 뿐
딱히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치맨데...
우리 두 사람은 그저 약국으로 밀려날 뿐이다.
돌아오는 길, 햇살은 따스하게 내리는데
옷을 가볍게 입지 않았는데도 찬 기운이
몸을 싸늘하게 식히며 움츠리게 한다.
약봉지만 한가득 들고 왔다.
저 약봉지들이 내 기억을 유지시킨다니.
나는 생각해 본다. 저 약들이 내 기억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가 나를
확인한다는 것을.
집에 오자 아내는 국에 밥만 말아 한 술 뜬다.
늘 내 먹을 것 챙기는 아내다. 아내가 언제 밥을 먹는지 통 못 봤다.
"아... 추를 만났네"
추위를 만났다는 아내가 밥 한술에 몸이 녹았는지
나를 부른다.
"약 달력에 약 꽂아야지"
"어, 알았어. 간다."
치매약은 내 기억을 유지시킬 일용할 양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