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의 나를 찾는 시간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하다못해 치매상태에 있는 나도 그렇다. 곧잘 잊어버리면서도 희끄무레한 기억들이 떨어진 밤들을 여기저기서 하나, 또 하나 줍듯 띄엄띄엄 떠오른다. 짧은 편린의 조각들이 불쑥 밀려오지만, 잠시 뒤에는 다시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기차의 철길처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면서도 불쑥 두 걸음을 내딛는다. 순간 휘청대는 정신이 혼란 속에서 자리를 잡으면, 어느새 그 짧은 기억이 사라지고 없다. 나의 기억 속에 이 반듯한 철길이 느닷없이 휘어지며 어지럽게 휘청거린다. 곧게 서서 앞을 보면, 어느새 기억의 길은 사라지고 낯선 길이 눈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낯설어진 길의 편린 틈 사이에서 오늘도 나는 중심을 잡으려고 비틀거리며 걷는다. 비틀거림이 비틀거림과 맞물려 중심을 잡는다. 남들의 눈에는 비틀거리지만 내게는 중심을 잡고 있는 방식이다.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오래전 기억들을 조각처럼 하나하나 소환시키고, 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과 남녀공학이었던 중학교, 그리고 역사를 자랑한다는 고동학교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일주일마다 한 번씩 들어가면서, 누구나 그렇듯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어느 사이 대학교를 졸업했다. 또 다른 학문들이 부지기수로 내 눈에 줄을 섰지만 5남 4녀의 막내로 배울 만큼 배웠으니 부모님 고생은 그만큼이면 되었다 싶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나는 지금 가족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치매라는 질병을 유전처럼 물려받아 하루하루 잊고 기억하고, 잃어버리고, 다시 찾는 반복의 하루를 보낸다. 어쩔 때는 긴 시간을 걸려 찾을 때도 있다. 때로는 잊어버렸던 무언가가 불쑥 눈에 뜨일 때가 있다. 크지도 않은 조그마한 집이란 공간에서 물건 찾기란 내게 광활한 대지처럼 넓다. 하다 못해 글을 쓰고 있는 책상머리에서도 '어디 갔지?' 하며 헤맨다. 책상을 죄다 다시 정리하면서 뒤지고 찾고 난리법석이다. 그걸 지켜보는 아내도 한숨을 내쉰다.
"정리를 제대로 해놓으면 그럴 일도 없잖아?"
아내의 정리와 나의 정리는 서로 다른가보다. 아내의 정리는 '반듯'하게, 나의 정리는 '손에 잡히는 대로'이다. 앉은 이 책상이 내게는 글을 쓰고, 일기를 쓰고 브런치에 글을 쓰고 노트에 하루하루 시간표를 짜는 나의 세계이다. 1 MX0.6 M. 좁은 책상머리다. 그러나 내게는 광활한 넓은 세계로 펼쳐진다. 일기를 쓰고, 때론 단편 소설을 끄적거리면서 뉴스들을 정리하고, 노트에 줄을 그으며 하루하루의 시간들을 적어내면서 내 하루의 삶을 하루하루 마감한다.
문득 화구통이 떠오른다. 사군자 수업을 마치고 박물관 관람을 갔는데 집에 와보니 화구통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같이 동행했던 선생님 차에 놔두고 내렸나 싶었지만 전화를 받고 보니, 차에는 화구통이 없다고 한다. 없으니 없다는 것이겠지 하고 받아들인다. 문득, 사라져 버린 화구통을 생각한다. 그림 작업실에 그대로 있으면 좋으련만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수업공간과 박물관을 확인해 보겠지만 나 스스로가 보관하지 못한 물건이 어디서 나를 기다릴까.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달려 나가 찾아보고 싶다. 내일이 다른 수업이 있으니 그때 같이 확인할 수밖에 없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천형 같은 치매가 시간이 갈수록 나를 어지럽게 만든다. 두 곳뿐이다. 수업장소와 박물관이다. 그게 아니면? 택시를 타고 왔는데 거기서? 아니면 혹시 기억에 없는 동사무소 쪽에서? 수업장소는 내일 다른 수업으로 가니 확인해 볼 수 있다. 박물관? 전화해 보면 된다. 동사무소? 가서 물어보면 된다. 없다면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하는 데까지는 해볼 수밖에. 아내도 그 화구통을 포기한 모양이다. 붓과 도구들이 있는데 말이다. 개발에 편자라더니 딱 그 꼴이다. 소리도 없이 사라진 화구통,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나를 뿌리치고 어디로 갔는지 오리무중. 오늘도 답답한 하루가 되어간다. 분실된 물건이 잊어버린 기억처럼 희미해지고, 나는 마음을 추스르며 한숨 크게 내쉰다. 행동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없으면 찾고, 또 없으면 다른 곳을 찾고, 물어보고 어딘가에서 꼬투리라도 걸리기를 기대하며 휘젓기라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리 없이 사라질 것이다. 나라는 존재도 그렇게 말이다. 결국 내 존재의 확인 과정이다. 내가 살아있다는 증명과정인 것이다. 결국 멈출 수 없는 길에 놓여있는 존재의 확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