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깜빡깜빡 잊어버린다
오늘은 먹을거리들을 사려고 걸어서 찾아간다. 그저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은 집 나서자마자 횡단보도를 건너 쭉 내려간다. 오분정도 걸으면 이층짜리 도로를 건너는 육교 엘리베이터가 있다. 걸어서 오르내려도, 다리 아프면 그냥 엘리베이터로 쓰면 되는 물건이다. 나? 올라갈 땐 걸어 올라가고, 내려갈 땐 육교 엘리베이터를 탄다. 내려가는 계단은 무릎에 좋지 않기에 엘리베이터로 내려간다. 먹을 고깃거리 삼겹살과 목살을 가격대비 품질 따져 골라 든다. 그 외에 먹을거리들 많지만 내가 먹을 것들이 아닌 그저 눈만 슬쩍 눈구경이다. 군것질 거리들이 많지만 내가 먹어서는 안 될 것들이다. 눈구경으로 끝나고, 아내가 먹을 만한 거리들을 슬쩍 훔쳐본다. 그렇다고 전화까지 걸어 먹고 싶은 것 물어보지는 않는다. 먹지 않는다는 것 알기에 그저 생각뿐이다. 오늘은 빨간 날 일요일이다. 요일에 상관없다. 산을 먼저 다녀온다. 맨발로 걷는 게 일상이라 흙도 밟고, 어쩔 땐 나무뿌리를 밟기도 하며, 큰 바위 같은 돌을 빙글 돌아서 가기도 한다. 돌 위로 걸어갈 수도 있지만 그건 내 걷는 테두리가 아니다. 늘 걸어서 가는 그 길로만 똑같이 걸어간다. 어디를 가든 간에 목적지가 있으면 기억된 길로만 걷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오래전에는 이 길로도 저 길로도 다니면서 길을 익히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지금의 기억력으로는 오히려 오고 가는 길이 헛갈릴 수 있기에, 이제 그런 모험 아닌 모험은 하지 않는다. 어찌 되었든 간에 오늘 장보기 하고 나서 오늘 길은 잘 갔다 왔다. 몇 걸음 낭비하지 않고 최대 단축 거리를 가로지른다. 오래전에는 그런 길도 돌아가보고, 낯선 길도 걸어보았지만 그때는 그 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하루에도 달력의 날짜를 여러 번 본다. 그런 사이에 또 헛갈리고 혼동된다. 오늘 나가는 스케줄이 맞는지, 달력에 표시는 되어 있는데 그 날짜에 움직여야 할 까닭을 찾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땐 어쩔 수없이 아내에게 지나치는 말처럼 묻는다.
"나 오늘 어디 갈 때가 있나?"
"오늘 갈 때 많잖아? 어딘지 하나도 생각이 안 나?"
"글쎄? 생각이 날듯 말듯하네?
웃고픈 이야기다. 내가 기억해야 할 것을, 아내가 자신의 일도 아닌데도 기억해줘야 한다. 말을 하지 않지만, 아니, 조금은 내비치지만 때로는 한숨을 내쉬며 답답하다는 듯 말을 건네기도 한다. 이 정도면 웃픈 이야기가 아니다. 울고 싶은 이야기 그 자체이다. 유전처럼 아무리 가족력이라고는 하지만 정말 이건 심하다 싶다.
책도 자주 빌려오지만 하루에 다 읽지 못하고 며칠을 쪼개어 읽는다. 그러다 보니 중간을 읽을 땐 벌써 앞의 이야기가 희미해진다. 마찬가지로 다 읽고 나면 그 내용이 어렴풋이 지나가고 몇 시간 지나면 그 내용이 벌써 소멸상태에 가까워진다. 거짓말 같은 참말이다.
"대충 읽어서 그런 거 아냐? 꼼꼼하게 천천히 읽어야지?"
아내는 그렇게 말할 때도 있지만 나는 다르게 이야기한다.
"빠르게 읽는 것도 아닌데 읽고 나서 돌아서면 기억이 날 것 같으면서도 안 나네?"
늘 책을 읽으면 반복되는 이야기다. 물론 다 읽고 나면 감상문을 쓰지만 웃프게도 책을 줄거리만 읽듯 다시 떠들어 봐야 할 때가 대부분이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
아마도 이 번주 목요일 시토크에 가서 시 낭송을 하게 되어 있을 것이다. 영주 씨 차를 타고 같이 가는 걸로 짜여있는데 정확히 맞는지 잘 모르겠다. 게다가 시낭송 경연대회에도 신청을 해놓았다. 역시 낭송 시는 "소" 김기택이다. 맞겠지 싶다. <마로니에 공원 시 낭송은 별개의 것이어서 다 끝나고 신경 써도 될 문제이다. 오늘은 일요일이라니 어디든 갈 일은 없어 다행이다. 시낭송 수업도, 헬스클럽도, 또 다른 모임도 없는 상태이다. 이런 날에는 낭송해야 할 시들을 차분히 낭송해 보고 새겨지도록 절로 말이 술술 나올 때까지 외우고 암송할 때다. 이런 활동들이 내 치매상태를 좀 더 늦추면서 기억력을 조금이라도 보존해 줄 수 있는 장치이다. 날씨 좋은 화사한 날, 오늘은 책을 차분하게 읽어야 하겠다. 스케줄에 있는 대로 하나씩 할 도리밖에. 그것이 내 활동의 최선일 듯 싶다.
10월 19일 일요일 점심때가 시나브로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