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알츠하이머인 내가 읽은 책

by 수필천편

산다는 것이, 목숨이 붙어있다는 것이, 먹는 밥이 목으로 넘어가는 것도 생존의 비참함일 수도 있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은 짧은 감상의 기록이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체포되어 수용소로 끌려간다. 같은 동료들이었던 사람들 일부가 '카포'가 된다. 같은 동료이면서도 그 동료를 감시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조금 더 나은 수용생활을 위해 동료들을 저버린 셈이다. 적군보다도 동료가 자신들을 감시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빵 몇 조각이라도 더 받기 위해, 조금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말이다. 독일군이 더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으니 어떠했을까, 짐작도 가지 않는다. 물론 이들은 엄혹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은 이들은 있었다. 가스실의 엄혹한 처형을 피해 살아남은 이들, 그들이 아니었으면 이 잔혹한 현장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인간의 존엄성은 말로만 되뇌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인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도 스스로 자신의 몸을 지켜가며 살아남은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지 알 수없다. 만약 그 사람들 속에 내가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최후까지 수용소에서 버틴 사람들의 심정을 알 수나 있었을까? 이런 현장의 기록을 책으로 읽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아니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전쟁이란 것을 겪어보지 못했기에 그 참상과 고통을 책으로, 또는 영화로 보아왔지만 기록에 지나지 않는 사실들과는 그때 당시의 엄혹함을 백분지 일도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책을 읽어가면서도 주춤주춤 읽어 내려갔다. '나라면?' 하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알 수 없다.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기에 독서의 감상이 잔인함에서 점점 슬픔으로 변해간다. 해피앤딩이란 말도 있지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생존자에게 감히 그런 말을 꺼낼 수는 없을 것이다. 죽지 못해 사는 심정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산다는 것이, 목숨이 붙어있다는 것이, 먹는 밥이 목으로 넘어가는 것도 생존의 비참함일 수도 있는 것이다. 죽은 동료를 묻으면서 그 대가로 하루의 노동을 쉬게 되는 것이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살아남은 사람의 비참한 일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의 사상의 차이로 누군가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전후 세대에 살아오면서 전쟁을 글로만 영화로만 경험한 나로서는 감히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면서도 먹먹해진다. 사상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듯이 말이다. 다툴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가 죽어가는 일은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