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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

수업에서 만난, 운명적인 색깔 “체리레드

by 사이 Mar 1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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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빨간 머리로 염색을 했다. 염색을 많이 해보지도 않았고, 하게 되면 늘 무난하게 갈색계열만 했었는데, 처음으로 탈색까지 하면서 색을 내봤다.


작년 9월, 3학년 2학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인적자원관리> 수업날, 앞쪽에 앉은 여학생이 빨간 머리를 반묶음으로 묶은 채, 내 건너편 대각선 자리에 앉았다. 적당히 아담한 키, 뿔테안경이 어울리는 동글동글 귀여운 얼굴, 빈티지하고 힙한 무드. 밝고 통통 튀는 성격이 눈에 띠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지만, 강의실에 들어오면 늘 친구와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고, 강의가 끝나면 다른 친한 친구들과 인사하기 바빴으니 아주 틀리진 않을 것이다.


나는 171cm의 비교적 큰 키에 좀 성숙한 인상이다. 요즘은 평균키가 높아졌다고 하지만,  내가 학창 시절 때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학창시절에 나는 학년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키가 컸고, 이러한 이유 탓에 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내 본래 나이보다 조금 더 많게 봤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사람들은 나에게 더 어른스러움을 기대했고 가끔은 어린 내 모습이 들통날 까 봐 대화할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소녀 같은 분위기의 사람을 보면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자유롭고 사랑스러운 사람들. 그 빨간 머리 여학생도 그랬다.


수업이 끝난 후, 나는 인스타그램에 그 머리색을 검색해 봤다.

(#빨강염색 #레드염색 #딥레드 … )

쭈욱 알고리즘을 타고 들어가다 보니 “체리레드”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낮은 채도의 짙은 붉은색, 빛을 받으면 은은하게 고급스러운 색감. 딱 그 머리색이었다.


그날 이후 그 색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몇 개월을 망설이다가 결국 미용실에 갔다. 잔뜩 저장해 두었던 빨간 머리 사진들 중 하나를 골라서 보여 드리며, 이렇게 해달라고 당차게 말했다. 하지만 미용사 분의 대답은 한껏 들떠있는 나를 한순간에 가라앉게 했다.


“이건 탈색해야 나와요.”


나는 당황했다.  블로그와 sns에서는 탈색 없이도 가능하다고 했는데… 탈색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잘 관리할 엄두도 안 나고, 무엇보다 비용이 부담됐다. 살면서 언젠가는 해볼 거라고 다짐했지만, 그날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마음의 준비가 조금 더 필요했던 것 같다. 그래서 원하는 색깔이 안 나올 수도 있다는 고지를 듣고, 동의하여 탈색 없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레드로 부탁드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보여드린 사진이 체리레드가 아니라 브릭레드였던 것이다. 저장해 둔 머리색이 모두 같은 색깔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염색이 끝나고 거울을 보니, 익숙한 갈색이 또다시 내 머리를 덮고 있었다. 실망스러웠다. 이번에는 다를 줄 알았는데 여전히 변하지 않은 내 모습 같았다.



그 이후로, 벌써 반년이 지나서 지금이 왔다. 그리고 지금 나는 휴학을 했고, 더 이상 학교에 매이지 않아도 됐다. 상담실습을 하는 날에는 상담자의 기본자세로서, 늘 단정하고 깔끔해야 하기 때문에 대학생임에도 복장을 늘 신경 써야 했는데 일단 지금만큼은, 그런 답답한 상담심리학과 학생이 아니었다.


이제는 하고 싶어. 휴학도 했겠다, 확 탈색해 버려?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오를 즈음, 어느 날 집에서 넷플릭스를 보며 뒹굴거리다가 정말 충동적으로 미용실 예약을 잡았다. 예약 요청란에는 이렇게 적었다.


“탈색 없이 가능하면 좋겠습니다.”


탈색이란 게 나한테 엄청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나 보다. 이렇게나 의지가 섰는데 여전히 한구석엔 망설여지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전 미용사분이 ‘이렇게 두세 번 더 염색하면 점점 색이 진해진다.’고 했던 말이 나에겐 작은 희망이었기에, 애타는 마음으로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가는 내내 빨간 머리를 한 나를 상상하면서, 올봄과 여름에 그 머리색을 하고 어떤 옷을 입을지 어딜 갈지 하는 행복한 상상 속에 젖어있었는데 마침 미용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왠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고객님이 원하시는 색은 탈색하셔야 해요~”


그놈의 탈색!!

잠시 망설여졌지만 이제 더는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한 번만 하면 돼요?”


확인 후, 탈색 한 번이면 된다는 말을 듣고,

내 행복한 상상들을 지켜내며 다시 미용실로 향했다.


처음으로 해보는 탈색이라 이렇게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줄 몰랐다. 그냥 염색하는 것보다 소요시간이 훨씬 길었다. 하지만 직원분들이 친절하시고 여러 질문들에도 잘 대답해 주셔서 긴장이 풀렸던 것 같다. 원래 다니던 미용실은 늘 조용하고 무표정한 분위기여서 어딘가 불편했는데, 이곳은 밝은 분위기 덕분에 나도 덩달아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머리를 말리는 순간!

어둡게 젖은 머리가 말릴수록 점점 밝아지면서, 붉은 색감이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브라운기가 돌지 않는, 오로지 ‘빨강’만 담긴 머리카락. 기대했던 것보다 살짝 더 밝았지만, 그래도 “체리레드” 색깔이 드디어 내게 물든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미용사 분께 안내를 받는데, 탈색한 머리는 신경 써야 할 게 정말 많았다. 컬러샴푸나 약산성 샴푸를 써야 하고, 찬 바람으로 말려야 하고, 잦은 케어도 필요하다. 하지만 하고 싶었던 걸 해낸 기분은 그보다 더 큰 만족감 안겨주었다.


첫 탈색!첫 탈색!


P.S

염색한 다음날,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으러 갔다. 까만 건물에 반사되어 비친 내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낮에 햇빛을 받으니 생각보다 더 강렬한 빨강이었다. ㅋㅋㅋ.. 온통 검은 머리 사이에서 나만 새빨~간 머리였던 탓에 힐끔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느껴졌다.

‘좋아하는 식당에 가서 조용히 혼밥 하는 걸 좋아하는 내가, 이렇게 눈에 띄는 머리와 잘 지낼 수 있을까?’ 잠시 걱정되었지만,

그래도 내가 하고 싶었고, 좋아하는 것을 드디어 해낸 거니까 시선을 피하지 않고 즐기는 연습을 해보려 한다.


빨간머리로 첫 혼밥빨간머리로 첫 혼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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