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자리 없이 흐르는 시간
오늘, 알레르기 검사 결과를 받으러 다녀왔다.
굴, 조개, 마카다미아에 알레르기가 있다는 결과를 보며 조금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한 때 나와는 무관한 이야기일 줄 알았던 것들, 변화와 상관없이 그대로일 것만 같았던 것들이 결국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구나 싶었다.
그래, 어찌할 바 없겠지. 담담하게 생각하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는 동기들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친구의 생일을 핑계 삼아 한자리에 모이는 저녁. 나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얇은 코트 속에 손을 깊숙이 찔러 넣은 채 버스를 기다렸다.
마침 5001번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고, 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올라탔고 버스 안은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출입구에서 간신히 두어 걸음 내디딘 순간, 그제야 오늘이 개강 첫 날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앳된 얼굴들 위로 들든 기운이 번져있었다.
차창 밖으로도 바삐 움직이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불현듯, 친구들과의 단체 채팅방이 아침부터 하루종일 바쁘게 울렸던 게 떠올랐다.
“나는 학교 중앙 카페인데, 다들 어디야? 끝났어?”
정신없이 오가는 메세지들. 개강 첫날의 북적임과 설렘이 핸드폰 화면 너머로도 느껴졌다.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휴학기간이 무의미하게 흘러가 버리면 어쩌지’
언제나 스며드는 조바심과 나 자신에 대한 불신.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도 모르게 함께 들뜨는 기분이었다.
이유를 곱씹어 보았다. 아마도, 좋은 마음을 공유받을 여유가 생겼기 때문일까. 나조차도 몰랐던 작은 빈 공간이 내 안에 생겨난 걸까.
나와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조차, 이제는 조용히 품어낼 수 있을만큼.
친구들을 만나고 나니, 버스 안에서 잠시 스쳤던 소외감이 오히려 희미해졌다.
나만 학교에 가지 않으니 조바심이 더 심해지면 어쩌나, 나 스스로를 또 닦달하며 불안에 휩싸이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런데 막상 친구들을 마주하자, 모든 것이 여전했다.
한 학기 휴학을 한다고 해서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친구들은 여전히 웃고 떠들었고, 그들 사이에서의 나 역시 변함없이 그자리에 있었다.
나지막하게 마음 속에 안도감이 들었다.
처음 맞이하는 휴학, 그리고 나 빼고 모두가 학교로 돌아간 하루.
그 낯설고 불안했던 감정들이 친구들과 만남 이후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본 세상, 그 속에서도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의 것들.
모든 게 그대로여서 오히려 다행힌 오늘.
꺼내입은 얇은 코트 사이로 찬바람이 스며든다.
‘아직 이 외투를 꺼내입기엔 조금 이른가’
어쩌면, 나 역시도 들뜬 마음이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