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색을 빚다
산의 등뼈에 걸려있는 붉은 해가 유독 지쳐 보이는 저물녘이다. “꺄악!” 갑자기 주말농장에서 비명이 메아리쳤다. 하늘 바다라는 닉네임을 가진 여자가 우리 밭으로 뛰어오더니 어처구니없게도 내 등 뒤로 숨었다. “뱀, 뱀, 뱀, 뱀이 있어요! 저기, 봉숭아밭 근처 돌 밑에 있어요!” 하늘 바다는 자기 몸속에서 해일처럼 끓고 있는 떨림을, 내 심장까지 전달시키는 능력자였다.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사십 대 중반인 하늘 바다는 열 평 남짓인 밭 절반을 꽃밭으로 할애하여 국적을 알 수 없는 온갖 꽃들을 살게 헸는데, 내가 유일하게 아는 체하면서 눈인사를 나누는 것은 토종 봉숭아였다. 나머지 땅에서 사는 농작물 역시 우등생은 아니어도 상위권에 들 정도로 푸릇푸릇 토실토실 제법 성적을 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농장에서 살다시피 했으니, 아무리 하늘 바다가 농사에 문외한이라고 해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도 하늘 바다에 대한 평은 인색했다. 주말농장에 와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살갑게 인사하는 법이 없었고, 커피 한 잔 나눠 먹지 않았으니 누가 후한 평을 하겠는가. 그런 존재였으니, 나도 부담스러웠다.
하늘 바다는 꽃밭의 경계로 둥글둥글 돌멩이들을 불러들여 예쁘게 꾸며놓았다. 그 꽃밭 앞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진짜 살모사다!” “에이, 뱀이 아니라 벌레잖아!” 영락없이 살모사처럼 생긴 애벌레 세 마리가 들추어낸 돌멩이 밑에서 고물고물 살을 비비고 있었다.
하늘 바다는 휴대전화를 끄집어내기는 했으나 여진처럼 심한 손 떨림을 감당하지 못하고는 사진 찍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는 구원을 요청하듯 간절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모기 잡을 때 쓰는 약을 뿌리면, 저 애벌레도 죽을 겁니다.” 누군가 제법 확신에 찬 말을 뱉었다. 하늘 바다는 아무리 그렇다고 어찌 살아있는 생명을 살충제로 죽일 수가 있냐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잘 났다! 잘 났어!” 주위에서 서성거리던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돌아섰다. 나도 엉거주춤 돌아서다가 애벌레들이 봉숭아를 먹고 사는 것 같으니까, 그것만 치우면 벌레들이 자연스럽게 사라질 거라고 조언했다. 이번에도 하늘 바다는 고개를 흔들어댔다. 봉숭아가 이제야 청춘인데 어떻게 없앨 수 있냐고. 그러면서 하늘 바다는 오늘따라 무겁게 짓누르는 산그늘을 지고 타박타박 주말농장을 질러갔다.
하늘 바다가 사라지고 나서야 다시 애벌레들 쪽으로 갔다. 머리 쪽에 또렷한 뱀눈 문신이 눈을 서늘하게 하였으나 삐죽하게 솟아오른 꼬리를 보자 순한 박각시나방 애벌레가 떠올랐다. 그런 생각을 하자 뱀눈 문신이 보름달처럼 보였다. 만삭의 보름달 문신은 애벌레의 몸 뒤쪽으로 갈수록 희미해졌다. 어쩌면 그들은 달을 신으로 모시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저렇게 자기 몸속에다 달을 키우고 사는 것이다.
나는 다른 돌을 들추어내다가 다시금 깜짝 놀랐다. 거기에도 애벌레가 뒹굴고 있었다. 살모사는 돌을 좋아한다. 지난달이었던가. 늦은 저녁에 이웃집 쌍둥이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연못가에서 뱀이 나왔다고 하면서 집으로 좀 와달라고 했다. 그 집 마당 가에 있는 연못으로 갔더니, 어리디어린 살모사들이 돌 밑에서 겁에 질려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나는 어린 것들을 달래면서 숲 깊은 곳에다 바래다주었다. 그런 기억을 떠올리면서 녀석들에게 속삭였다. “어쩌면 돌을 좋아하는 것까지 닮았냐?” 내 말을 들었는지 그중 한 놈이 다른 돌멩이 밑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일이 생긴 뒤로 하늘 바다는 농장에 와도 자기네 밭에는 가지 않았다. 그냥 멀리서 쳐다만 보고 돌아섰다. 그 틈을 노린 잡초들이, 그동안 하늘 바다에게 당한 것을 화풀이하듯이 일제히 몰려나와서 농작물들의 공부를 방해하는데도,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만 지었을 뿐이다. 그렇게 농사를 포기해버렸다.
예상대로 그놈은 박각시나방의 한 부족인 주홍 박각시나방 애벌레였다. 녀석은 봉숭아와 달맞이꽃을 주식으로 하고, 살모사 닮은 외모 때문에 애벌레에 대한 혐오감을 주는 대표적인 놈이었다.
그로부터 1주일이 지났다. 우리 집 2층 방에서 푸른 애벌레하고 마주쳤다. 아이들 새끼손톱만큼이나 작았다. 먼지가 버무려진 낡은 거미줄을 뒤집어쓰고 있는 꼬락서니를 볼진대 밤새 2층 내 책방을 구석구석 헤매고 다닌 모양이다.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하도 낯가림이 심해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고개를 처박은 채 움직이지 않는다.
2층에는 애벌레를 키우는 방이 있다. 그곳으로 녀석을 데려간 다음 온갖 풀을 뜯어다 주었다. 애벌레가 어디서 왔는지 추적하기 위해서는 무슨 풀을 먹는지 알아내야만 한다. 그것만 알아내면 벌레의 존재적 비밀도 풀어낼 수 있다. 애벌레는 이 풀 저 풀 냄새를 맡기는 해도 무엇 하나 입에 대지 않는다.
나는 한숨을 내뱉다가 베란다에 있는 봉숭아 화분을 보았다. 혹시나 하고 애벌레를 화분에다 올려놓았더니, 대뜸 줄기를 타고 올라가서 길쭉한 이파리 밑에 자리를 잡는 게 아닌가. 아, 봉숭아를 먹고 사는구나! 나는 화분을 애벌레의 방으로 들여놓고 숨을 죽였다. 그렇게 1시간이 흘렀다. 낯선 분위기가 익숙해지려면 그 정도 시간은 필요하다. 그제야 녀석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봉숭아잎으로 허겁지겁 배를 채운다.
“어쩌면 넌, 먼먼 옛날에 맥이라는 동물이랑 같은 조상이었을지도 몰라.” 나는 봉숭아 잎을 갉아 먹는 애벌레 옆에 쪼그려 앉아서 종알종알 말을 걸었다. 애벌레의 입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데다가 머리 쪽 살 속에 완벽하게 숨겨져 있어서, 그것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봉숭아 잎을 먹을 때만 맥의 코처럼 가늘고 길쭉한 주둥이를 내밀었다. 그 끝에 입과 세 쌍의 작은 앞발이 설치되어 있다. 입은 작아도 자동기계가 장착된 것처럼 턱 운동이 빨라서 봉숭아 잎 하나를 뚝딱 먹어 치운다. 그렇게 빨리 턱 운동하는 애벌레를 본 적이 없다.
왜 그렇게 작은 입을 선택했을까. 나는 푸른 애벌레의 역사를 상상하려고 애를 썼으나 문서 하나 남기지 않은 그 종족의 서사를 추적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벌레의 몸에는 온갖 기호학적인 문신들이 뿌리박고 있다. 혹시 그런 것들이 그 종족의 신화가 응축된 상형문자가 아닐까.
애벌레는 전혀 소리 내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 공업용 미싱 수준으로 턱을 움직이는데도 아무런 소음이 없었다. 작은 입의 비밀은 소리 없음이다. 그 벌레는 소리 없이 먹기 위해서 작은 입을 설계했고, 대신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구경이 작은 한계를 극복했다. 아무래도 소리가 나면 새나 기생벌에게 포착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질 테니까. 아마도 질긴 나무 이파리를 주식으로 삼았다면, 소리 없이 먹는다는 것이 불가능했으리라. 그 애벌레는 정략적으로 봉숭아잎을 주식으로 삼은 셈이다. 봉숭아잎은 수분이 풍족하고 부드러워서 빠르게 씹어도 소리가 나지 않고, 급하게 위장으로 밀어 넣어도 소화를 시키기에 부담스럽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