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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권 Nov 11. 2022

맨드라미 화전에다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번 주 금요일 저녁 저희 집에서 간단하게 식사할까 합니다.”

 한마을에 사는 지인 설씨가 ‘편책모(편안하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카톡방에다 올린 글이다. 설씨는 한 달 전 아버지의 장례식 때 도와준 분들에게 밥 한 끼 대접하고 싶다고 하였다. 오늘이 그날이었다. 태풍이 한바탕 비질하고 지나간 뒤라서 하늘은 하염없이 맑았고 들꽃들을 흔들어대는 바람도 시원했다. 참 좋은 날이었다. 집안에는 이미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손님들이 밥상 앞에 앉자 설씨의 아내가 마지막이라고 하면서 커다란 접시를 들고 나왔다. 맨드라미 화전이었다. 나는 찹쌀을 버무려서 맨드라미꽃을 수놓은 다음 지져낸 그 소박한 떡을 보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다.

 “말로만 듣던 맨드라미 화전을 이렇게 먹어보네요. 우리 어렸을 때는 이런 걸 해 먹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거든요. 맨드라미꽃 씹히는 질감이 예상외로 좋네요. 이런 맛일 줄은 몰랐네.”

 “맞아요. 상큼하면서도 시큼한 단맛이 나네요! 그냥 눈으로 보는 화초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걸 먹다니 믿어지지 않아요. 씹을수록 신맛이 나는데 그 신맛이 참 오묘하게도 입맛을 돋우네요.”

 “참 이런 걸로 떡을 해먹다니, 우리 조상들의 지혜도 대단해요. 살짝 익힌 거라 맨드라미꽃은 거의 익지 않았는데도 전혀 부담이 없어요. 어떻게 이런 향이 날까요?”

 우리는 저마다 한마디씩 하면서 맨드라미 화전을 음미하였다. 술잔이 오가고 사람들의 배가 불러올 즈음 설씨가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아니었으면 아버지 장례식을 치르면서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전 친구도 없고, 친척도 없고, 유일한 혈육인 동생도 연락이 안 되고, 진짜 미치겠더라고요. 그래도 여러분들이 오셔서 같이 밤을 새워 주시고..... 그 동안 친구고 뭐고 신경 쓸 겨를도 없었어요.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아등바등해온 거죠. 누구한테 투정 부릴 곳도 없었고, 하루하루 죽지 않으려고.......”

 설씨랑 같이 모임을 한 지도 3년이 넘었지만, 그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작은 이발소를 하고 있으며, 동네 도서관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관장님의 소개로 우리 모임에 들어왔지만 아직까지 자기 주장을 한 번도 내보이지 않았을 정도로 입이 무겁다는 것. 그러면서도 가장 성실하게 책을 읽어올 뿐만 아니라 한 번도 모임에 결석한 적이 없다는 것. 그 어떤 자리에서도 자기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그 정도만 알고 있었다.

 설씨는 젓가락으로 맨드라미 화전을 집어 들더니 갑자기 눈빛을 허공으로 보내면서 모두의 시선을 피했다. 그의 몸이 떨렸다. 그래도 그는 그동안 살아온 힘으로 자신의 몸을 진정시키고는 다시 우리를 보았다. 키도 작았고 눈도 작았고 타인을 바라다보는 눈빛도 강하지 않아서 어디서건 눈에 잘 띄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덩굴처럼 모든 사람들을 꼼짝하지 못하게 휘감는 힘이 있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건 저를 키워준 어머니와 이 맨드라미 화전이었어요. 우리 시골집은 마을에서 가장 컸어요. 할아버지가 소장사를 해서 엄청 돈을 쓸었대요. 아버지는 물려받은 재산으로 편안하게 살았지요. 우리 집은 마루가 엄청 많았어요. 앞마루, 뒷마루, 사랑방 마루, 부엌방 마루, 온갖 툇마루. 집 돌담 가에는 온갖 나무들이 서 있었고, 그 밑에는 할머니가 심어놓은 온갖 꽃들이 자랐죠. 맨드라미, 접시꽃, 채송화, 봉숭아, 분꽃, 댑싸리, 붓꽃, 원추리, 황매화, 상사화.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아요. 그런 세상이 또 있을까요? 제 꿈이 돈 벌면 그런 집을 지어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겁니다. 저는 아무리 시세차익이 남는다고 해도 아파트는 안 살아요. 그게 인간이 사는 곳입니까? 달이 들어옵니까, 해가 들어옵니까? 꽃 한 점 나비 한 마리 새 한 마리 볼 수 없는 그런 곳이 집이라고 할 수 있나요? 전 강남에 있는 최고급 아파트를 살 형편도 안 되지만 한 번도 부러워해 본 적 없습니다. 어머니는 철마다 화전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주셨지요. 특이 여름이면 장독대 근처에서 붉게 핀 맨드라미꽃을 따다가 화전을 만들어서 아버지랑 뒤란 툇마루에 앉아서 술을 드셨어요. 술이 차면 노래도 하시고......그러다가 그곳에서 대범하게 사랑을 나누기도 했어요. 저는 어른이 되면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랑을 나누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별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 모습이 오히려 보기 좋았고, 나도 나중에 저렇게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그 어머니는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이었어요. 저한테도 참 잘해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그분을 생모처럼 따랐어요......”

 설씨는 자신을 낳아준 생모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다만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이었으며 설씨랑 동생을 낳자마자 어디론가 쫓겨났다는 말만 이웃집 할머니에게 엿들어서 알고 있었다. 설씨를 길러낸 사람은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이었다. 두 분은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설씨가 중학교 1학년이 되던 봄날 아버지는 아랫마을 처녀랑 잠을 자다가 들통이 났고, 그날 밤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어머니는 사흘간이나 광견병 걸린 개처럼 거품을 물고 골목골목을 소리치면서 아버지를 찾아다녔다. 그 충격으로 할머니는 방에 누워버렸다. 어머니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해 가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설씨가 어린 동생의 보호자가 되었다. 다행히도 읍내에서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던 먼 아재뻘 되는 분 도움으로 그 곳에서 일을 하면서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18살 때 서울에 왔다. 자신은 못 배워도 동생만큼은 가르치겠다는 각오를 다녔고, 결국 동생의 대학까지 뒷바라지했다. 그는 25살 때부터 이발소를 직접 운영하였다. 먹고 사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나타났어요. 엄청나게 좋은 고급 승용차에다 새 여자를 데리고요. 아버지는 1년에 한 번씩 여자를 바꾸면서 살았어요. 부동산 컨설팅 사무실에 나가기는 했지만 , 돈벌이가 없어서 시도 때도 제 통장을 털어갔지요. 돈을 안 주면 제 이름으로 사채를 써서 날마다 깡패들이 이발소에 들이닥쳐 더 힘들게 하였지요. 그러자 동생이 아버지하고 관계를 끊지 않으면 나를 보지 않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날 이발소 유리문이 다 깨질 정도로 싸우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어요. 그 뒤로는 소식을 몰라요. 그런데도 아버지가 나타나서 또 돈을 달라고 하더군요. 그날 저는 술을 먹고 아버지가 사는 다세대주택으로 갔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손발을 묶어 베란다 5층 옥상에서 던져버렸어요. 난 그 길로 곧장 경찰서에 찾아갔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 인간이 살아서 절 보러 왔더라고요. 아, 징글징글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죽으려고 아버지의 집에 가서 두 번이나 목을 맸어요. 그걸 보고서야 저한테 오지 않더라고요. 막상 저를 찾아오지 않자 이상하게도 또 아버지가 불쌍해 보이고 해서 말년에는 제가 챙겼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정신만 돌아오면 절 보고 세 번째 어머니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가장 미안하다고요. 가장 사랑했다고요. 그러면서 그 맨드라미 화전에다 막걸리 한잔하고 싶다고요. 근데 못 드시고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제가 삼우제 때 맨드라미 화전에다 술 한 잔 올렸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당신이 부럽더라고요. 맨드라미 화전을 부쳐서 술잔을 주고받았던 사랑하는 사람을 추억한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행복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상하게도 쓸쓸해지더라고요. 전 오십이 넘었지만 아무런 추억이 없거든요. 그냥 열심히 살았다는 기억, 그 흑백영화 같은 기억만이 남았을 뿐......그래도 맨드라미 화전을 해놓고 가까운 지인들이랑 술 한 잔 하면서 이런 말을 하니까,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지네요.”

 유독 화려해 보이는 맨드라미 화전과 음각 판화처럼 어두운 그의 얼굴이 교차하였다. 뭔가 그럴싸한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막상 입을 열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말이 사라졌다.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여름 햇살을 충분히 빨아들여 제 몸을 붉게 물들인 맨드라미가 수놓아진 전을 우물거리면서 허공을 올려다보는 이도 있었다. 그에게 충분히 위로가 될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 침묵이 더 위로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백 마디 위로의 말보다 때로는 이렇게 들어준다는 것이 더 위로가 된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고마웠다. 괜히 눈물이 나려고 했다.


<이 글은 2022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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