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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권 Nov 11. 2022

위로하는 애벌레4

-천상의 색을 빚다

아름다운 신     


 나는 주홍박각시 나방하고 이별 장소로 주말농장을 떠올렸고, 하늘 바다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하늘 바다는 나보다 먼저 나와 있었다. 내가 종이상자를 열고 나방을 보여주자, “와아, 대박! 그 애벌레는 흉측한 야수 같았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신이 나오시다니! 내가 그때 살충제를 뿌렸다면...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결국 내가 잘한 거죠? 그쵸, 맞죠?” 그렇게 아이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칭찬해달라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진짜 잘한 것이라고 고개까지 끄덕여주었다. 하늘 바다는 유달리 큰 눈을 굴리면서 착한 일 했다고 칭찬받는 아이처럼 웃었다. 이제야 하늘 바다의 내면이 보였다. 유독 낯가림이 심해서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이 힘들다는 말을 굳이 듣지 않아도, 내 선입견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 바다는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나는 분홍빛 신이 하늘 바다의 손바닥에서 놀다가 날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런 마음이 통했는지 분홍빛 신도 하늘 바다의 손바닥에서 30분 이상을 머물렀다가, 잔잔한 바람이 마중을 나오자 미세하게 날개를 떨면서 몸을 예열하기 시작했다.    

  

쭈글쭈글 물렁물렁 애벌레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해 늦가을, 나는 뜻밖에도 우리 집 마당에서 또 다른 주홍 박각시나방 애벌레랑 마주쳤다. 마당에도 그 애벌레가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반가웠으나 몸이 절로 움츠러들 정도로 급습해온 찬바람에 어찌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이봐, 이렇게 날씨가 추워졌는데 아직까지 이 세상에 머물고 있으면 어쩔 거야!” 나도 모르게 애벌레를 타박했다. 한평생 과거에 낙방한 늙은 선비가 마지막 과것길에 오르듯, 애벌레는 뭔가 절실한 걸음걸이를 급하게 다그쳤다. 애벌레의 마음과 달리 지친 몸은 자꾸만 비틀거렸다. 얼마나 굶었는지 몸은 쭈글쭈글했다. 당연히 몸 색깔도 유독 어두웠다. 애벌레는 우리 집 마당을 가로질러 양달에 있는 물봉선을 찾아갔다. 봉숭아 사촌인 물봉선은 이미 이파리를 떨군 상태로 깡마른 줄기만 남아 있다.

 어쩌나, 저것을 어찌한단 말인가. 어느 가난한 절에서 나온 탁발승처럼 보였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은 탁발승 따위를 존중하지 않은 지 오래였으니, 그가 둘러멘 배낭에다 쌀 한 줌이나 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애벌레들 세상에도 지진아가 있구나. 왜 늦었을까. 게으름을 피웠을까. 아니면 어디 먼 곳에 여행을 다녀왔을까. 아니면 그동안 병이라도 앓았던 것일까. 온갖 생각을 하면서 애벌레를 따라갔다. 

 애벌레는 물봉선 줄기에 애걸하듯이 매달려, 앙상한 뼈다귀를 억지로 물어뜯었다. 안쓰럽다. 당장 오늘 밤이 걱정이다. 이미 계엄령 같은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상태다. 견디어낼 수 있을까. 급하게 숲에 가봤으나 물봉선을 구하지 못했다. 그러니 더 이상 도와줄 방법이 없다. 게다가 동네 건달들처럼 물까치들이 날아왔다.

 한 놈의 부리가 애벌레를 정조준했다. 순간, 날카로운 부리가 물렁물렁한 생을 사정없이 쪼아댔다. 그래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애벌레가 매달린 줄기만 흔들릴 뿐. 다시 쫀다. 마찬가지다. 다른 놈도 가세한다. 또 다른 놈도, 그렇게 쪼고, 또 쪼고, 그들이 살아온 무게를 실어 더 거칠게 쪼고, 흔들고... 아, 제발 포기해라. 벌레야, 그만 놓아버려! 그런 말이 입안에서 맴돌도록, 쭈글쭈글 물렁물렁 애벌레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저항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버티기만 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저항하면서 이기는 게 아니라 그냥 버티어내는 것임을 애벌레는 잘 알고 있다. 버티는 것, 이럴 땐 꿈틀거려도 안 된다. 그냥 버틸 뿐이다. 

동그란 눈모양의 문신이 갈색 살모사 문양과 조화를 이루면서 더욱 공포심을 유발시킨다.

 결국 나도 모르게 물까치들을 쫓고야 말았다. 도저히 지켜볼 수 없었다. 물까치들이 나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그토록 사나운 부리에 쪼이고 쪼여도 애벌레의 쭈글쭈글 물렁물렁한 생은 조금도 상처 나지 않았다. 바람은 갈수록 폭력적으로 거칠어졌다. 고삐에서 풀려난 나뭇잎들이 허공으로 허공으로 날갯짓했다. 그들의 비상에 푹 빠져있다가 불현듯 애벌레를 보았더니, 녀석은 다시 어디론가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아, 그러니까 애벌레는 여기까지 오도록 수많은 부리에 물어뜯겼는지도 모른다. 그 뒷모습에다 내 손길을 보태주고 싶어도, 진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모르겠다. 그 나그네가 차라도 마신다면, 따뜻한 차 한 잔 정도는, 그 정도는 베풀 수 있었을지도. 어쨌든 한 생이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 글은 에세이 <<위로하는 애벌레(궁리, 2022년 11월 말 발행))>>에서 일부를 꺼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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