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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권 Nov 11. 2022

위로하는 애벌레2

-천상의 색을 빚다

피가 흐르는 옷     


 이렇게 새로운 애벌레가 집으로 들어오면 마음이 풍요롭고 든든해진다. 두세 종 정도만 키우기 때문에, 애벌레의 방은 복잡하지 않다. 앉아서 차를 마실 수 있도록 의자와 테이블이 있고, 나머지 공간은 일정하게 경계를 만들어서 애벌레가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어지간해서는 애벌레를 가두지 않는다. 그래야 같은 공간에서 같이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애벌레를 키우는 게 목적이 아니다. 같이 살아가는 법을 배우려고 할 뿐이다. 그곳에는 화분도 있고, 물병이 있고, 나무상자도 있다. 덩굴은 벽에 매달리도록 배려하였고, 나무는 깊은 물병에다 꽂아서 푸르름을 지탱하도록 하였고, 미라가 되는 애벌레들은 어두운 나무상자 안으로 모신다.

 애벌레 방으로 들어온 지 5일째 되는 날, 그 푸른 애벌레는 줄기에 거꾸로 매달린 채 단식을 하였다. 입고 있는 옷이 작아져서 더 크고 넉넉한 치수로 갈아입을 때가 된 것이다. 이렇게 새 옷을 갈아입는 행위가 애벌레들에게는 성인식이다. 은근히 기대되었다. 어떻게 달라질까. 애벌레는 그런 성인식을 통해서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변신한다.


몸속에서 발효시킨 분홍 봉숭아 물감으로 염색한 옷을 입은 나방

 애벌레는 살아있는 옷을 입고 있다. 애벌레의 옷에는 피가 흐른다. 그 옷은 몸을 지켜주는 보호막이고, 체형을 지탱해주는 뼈대이고, 세상 모든 것들하고 만나는 경계다. 날카로운 가시가 파고들면 푹 움츠러들면서 그 서슬을 피하고, 무거운 돌에 눌리면 온몸이 납작해지면서 그 무게를 이겨내니까, 돌보다 가시보다 더 강하다. 그 물렁물렁함을 보호해주는 옷은 애벌레가 일정하게 자라게 되면 몸에 꽉 조여 성장을 방해하니까, 반드시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그러니 피의 흐름을 끊고 헌 옷을 벗어내기까지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어내야만 한다. 이 녀석은 꼬박 이틀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애벌레들은 이런 식으로 성인식을 치른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 성장이란 이토록 고통스러운 침묵의 시간이다.

 다음 날, 애벌레는 거꾸로 매달린 채 머리 쪽에서부터 헌 옷을 벗어냈다. 뒷발에다 모든 무게를 걸어놓고는 중력의 도움으로 헌 옷을 벗는데도 꼬박 반나절이 넘게 걸렸다. 벗어놓은 헌 옷 꾸러미는 투명했다. 애벌레는 새로운 힘이 충전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윽고 자세를 바꾸어 그것을 다 먹어 치웠다. 

 애벌레의 몸이 별로 달라지지 않아 실망스러웠는데, 밤이 깊어가고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마법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몸에서 자라는 상형 문자들이 더욱 또렷해졌다. 연초록빛 옷이 갈색으로 바뀌더니 어느새 살모사 패션으로 바뀌어 있었다. 놀랍게도 주말농장에서 하늘 바다를 놀라게 한 바로 주홍 박각시나방 족이었다. 애벌레는 앳된 표정이 사라졌고, 이제는 제법 나이 든 어른의 얼굴이었다.

 나는 주홍 박각시나방 애벌레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지방 출장을 갈 때도 내내 녀석만 떠올렸다. 길을 가다가 봉숭아만 만나면 멈춰서는 버릇까지 어느새 몸속에다 뿌리내리고 있었다.    

 

 애벌레는 소리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주홍 박각시나방 애벌레의 생은 인간들보다 훨씬 여유롭다. 태양이 눈을 뜨면 애벌레는 잠자리에 들었다가, 태양이 고단한 몸을 이끌고 귀가할 무렵이면 출근 준비를 한다. 일터는 정해져 있지 않다. 이곳저곳 자유롭게 봉숭아를 찾아다닌다. 애벌레가 출근할 때는 갈색 체형이 땅거미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살모사 패션을 선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험심이 강한 것들은 제법 먼 거리까지 봉숭아를 찾아다니는데, 무시무시한 찻길을 겁 없이 지나다가 로드킬을 당하기도 한다. 만약 고양이라도 만나면 보름달 모양의 문양을 더욱 부풀리면서 깡다구 있게 상체를 흔들어댄다. 순간 고양이도 놀라면서 뒷걸음질 친다. 그들의 변신은 이렇게 완벽하다. 애벌레에게 일이란 먹는 행위이다. 한동안 일을 하고 나면 반드시 휴식 시간을 갖는다. 충분하게 쉬어주어야만 일이 즐겁고 노동의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애벌레는 잘 알고 있다.

거꾸로 몸을 뒤집은 채 중력을 이용하여 헌옷을 벗고 있다.

 까만 비구름이 몰려오자 애벌레 방에 있던 봉숭아 화분을 베란다로 내놓았다. 예상대로 소나기가 요란하게 굿판을 벌이면서 지나갔다. 다음 날 우연히 화분 밑에다 놓았던 받침 그릇을 보았다. 놀랍게도 받침 그릇에 잠긴 물이 노을빛으로 물들어있었다. 받침 그릇 속에는 애벌레의 똥 몇 개가 잠겨 있다. 봉숭아의 진실이 똥을 통해서 드러나는 순간이다. 애벌레는 봉숭아잎만 먹고, 배설물을 통해서 봉숭아의 근원적인 색깔을 우려낸다. 그것이 푸른 봉숭아의 심장에 숨겨진 진짜 색깔이다. 그렇게 애벌레는 살아가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니까, 굳이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이럴 때 언어가 무능해짐을 느낀다. 그래서 애벌레는 굳이 소리의 언어를 쓰지 않는다. 새롭게 돋아나는 이파리, 새롭게 피어나는 꽃잎, 새롭게 맺히는 열매, 그 모든 것들이 살아 있는 언어다. 애벌레는 그렇게 살아있는 언어를 온몸으로 듣고, 온몸으로 말한다.

 살모사 패션으로 살아가는 주홍 박각시나방 애벌레는 하루가 다르게 몸이 커지고 피부가 탱탱해진다. 성인식을 마치고 이틀 만에 거의 세 배 이상 몸이 커졌다. 애벌레가 먹는 봉숭아잎은 수분 덩어리다. 게다가 오줌도 싸지 않고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으니, 풍선에 물이 채워지듯 몸이 팽창하는 건 당연한 결과다. 새 옷은 수분 한 방울 새지 않는 완벽한 방수복이다. 애벌레의 피부가 탱탱해지면서 진갈색이 밝은 갈색으로 변해간다. 

 나는 피부가 까만 편인데다가 깡마른 체형이라 얼굴이 더 어둡게 보인다. 그런 외모 때문에 사춘기 때부터 살이 찌기를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 얼굴에 살이 오르면 까만 피부가 환해지는 법칙을 알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살이 오르지 않았다. 새삼 그런 기억을 곱씹으면서 애벌레의 부드러운 갈색 얼굴을 내려다본다. 애벌레는 표정이 밝아지면서 사색하는 시간을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금 줄기에 매달려서 단식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살아온 힘으로, 그 정직한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살아온 날들을 돌아다보았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몸속에서 맑은 무늬들이 반짝거리고 자꾸만 몸이 들뜨면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졌다. 날밤을 새운 애벌레는 태양이 눈을 뜰 무렵 땅으로 내려와서 방랑자처럼 걷다가, 어떤 깨달음을 얻은 듯 촉촉한 낙엽 밑으로 사라진다.  



  <이 글은 에세이 <<위로하는 애벌레(궁리, 2022년 11월 말 발행))>>에서 일부를 꺼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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