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리뷰
지난 3월 30일에 국립정동극장에서 연극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를 관람했다.
공연을 보고 나오는 길에 벅찬 가슴을 부여잡고 반쯤 충동적으로 프로그램북을 샀는데, 리플렛과 겹쳐서 책상 위에 고이 올려둔 그 프로그램북을 볼 때마다 무슨 이유에선지 자꾸만 눈물이 난다.
레즈비언 커플인 재은과 윤경, 그리고 그들이 입양한 딸 재윤의 이야기가 무려 장장 한 세기에 걸쳐 펼쳐진다. 그 시간 속에서 재은과 윤경은 단짝 친구였다가, 긴 첫 키스를 나누고, 애인이 되었다가, 결혼을 해서 부부가 되고, 재윤을 입양하고, 여느 부부들처럼 부부관계가 나빠졌다가, 이혼했으며, 끝내 다시 만났다. 2099년에, 우주에서, 여전히 퀴어인 채로, 사람인 채로, 서로를 생각하고 있는 채로, 노인인 채로.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a.k.a 이사다를 처음 관람한 것은 2023년이었다. 당시에도 공연을 보면서 많이 울고 웃었던 것 같다. 공연을 보고 나오는 길에 마주했던 온라인 프로그램북 속에서 "아무도 죽지 않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머리말에 적어두신 작가님의 담담한 한 마디에 가슴이 먹먹해졌던 기억도 있다. 그 당시에도 나는 이 연극에 몰입했고, 공감했으며, 어떤 동시대성을 느꼈고 그래서 좋은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024년에 다시 만난 이사다의 느낌은 좀 달랐다. 이번에는 단순히 '좋은 연극'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둘이 첫 키스를 나누는 장면, 행복하게 웃는 장면, 혼인신고 불수리 서류를 받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 크고 작은 다툼을 벌이는 장면, 이어폰을 나눠 끼고 '엔딩크레딧'을 듣는 장면, 노인이 되어 정적이면서도 역동적인 대화와 행동을 주고받는 장면 등에서 시도 때도 없이 울었다. 혼란스럽고 복잡한 감정이 이어졌다. 좋다-라는 간단한 언어적 표현으로는 형용될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다. 근 1년간 나는 무엇을 더 겪고 어떻게 더 변화했던 것일까? 초연 때와 연출적으로 달라진 부분이라던가 초연과는 다른 페어로 관람했을 때의 새로움 같은 것들 때문에 색다른 감정을 느낀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작년과 똑같은 플롯 속에서도 극의 전반적인 메시지와 분위기를 확연히 다르게 읽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울기보다는 많이 웃었다고 단언해서 말할 수 있겠다. 나는 행복하게 웃고 행복하게 울었다. 재은과 윤경이 퀴어 커플로서 진실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느꼈고 무대 위와 객석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나는 '불행한' 여성 퀴어 이야기를 싫어하지 않는다. 그 이유인즉슨 1. 여성 퀴어의 이야기가 아직도 너무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고 2. 그들이 불행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이야기가 저평가되기엔 이미 그것이 현실과 어느 정도 맞닿아있지 않는가라고 (어쩌면 조금은 납작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행하든 불행하지 않든 나에게는 여성 퀴어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퀴어를 떠나 불행한 여자 아이들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었고 그것에 별다른 불만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2024년, 이사다를 다시 만나고 내 안에 확고한 생각 하나가 자리 잡게 되었다.
나 행복한 여성 퀴어 이야기를 정말로 많이 보고 싶었네.
이사다는 분명히 여성 퀴어의 이야기지만 동시에 그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고, 또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랑 이야기임과 동시에 이 사회에서 규정하는 '사랑'에 반발하고자 하는 이야기다. 이렇게나 미숙하고 단단하면서 다정하고 차가운 퀴어 커플이라니. 사랑으로 다듬어진 인간들이 어떤 방법으로 우뚝 설 수 있는지, 어떻게 또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는지 눈앞에서 보고 나니. 나 이런 이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구나를 깨달았다.
퀴어 커플의 미래는 보다 어렵게 상상된다. 그렇지만 이사다는 그들의 미래를 무한히 상상하여 관객들을 미지의 공간에 데려다 놓는다. 만나고 이별하고 재회하고. 이 단순한 일련의 과정을 상상할 수 없었던 과거와 또 현재를 떠올리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내 눈앞에서 2099년의 재은과 윤경이 다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딸 재윤의 상견례를 가기 위해 다시 만나기도 하고 재윤의 결혼으로 인해 다시 만나기도 하고 또 화성으로 가는 우주선 안에서 다시 만나기도 한다. 그 순간까지도 죽지 않고 영원하다. 그들의 미래를 암담하지 않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경험 자체가 무척이나 귀하고 소중했다. 그것을 이사다가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들의 ‘헤테로’ 딸 재윤은 자신의 애인에게 사랑을 담담히 고백하고, 그 담백한 독백은 한참 동안 이어진다. 어두운 무대에서 작은 파란색 불빛에 의존한 채. 은하수 한가운데를 유영하는 것 같은 모습으로. 재윤의 모습에서 재은과 윤경의 모습이 조금씩 엿보이고, 함께 지나온 시간들이 보였다. 재은과 윤경 사이에 재윤이가 있어서 다행이다. 부부와 그들 사이의 자식 이야기 또한 퀴어에게 있어서는 배제되어왔던 것이기에.
그러면서도 결혼하자마자 유언장을 써야 한다거나 혼인신고 불수리 서류를 받기 위해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제가 정재은이고요 제가 최윤경이에요 하고 결연하게 외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웃으면서 울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2024년에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과정을 지나는 재은과 윤경의 모습이 서로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행복해 보이기 때문이다. 행복한데 안 행복한 거, 신나면서 슬픈 거. 극을 관통하는 대사가 이렇게나 이미지적으로 절절히 와닿는 연극이라니. 무대 위에서 그것이 확실하게 상연되는 연극이라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이사다는 사랑으로 다듬어지는 연극이다. 두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사랑으로 조명하는 이야기이고 '사랑이야기가 아니다'라는 부정 형태의 제목을 택했지만 이건 반드시 사랑 이야기여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사랑으로 불리지 않는 누군가의 사랑을 사랑이라고 못 박아 무대 위에 올려놓는 것. 그 자체로 뻔하고 강한 위로가 되었다.
나는 수많은 예술 중에서 공연이 주는 힘을 강력하게 믿는 편이다. 공연을 좋아하는 수백 수천 개의 이유 중 하나는 '커튼콜'이 있다는 것이다. 긴 러닝타임 내내 관객과 함께 호흡했던 사람들을 보내주어야 하는 때라 슬프기도 하지만. 극 속에서 싸우고 울고 웃고 안아주고 사랑하고 치고받던 인물들이 웃으면서 나란히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이라 좋아하는 편이다. 생각해 보니, '슬프면서 행복한' 장면이다.
이사다의 커튼콜에서 재은과 윤경은 '아틀란티스 소녀'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춘다. 몸이 부서져라 기합까지 넣으며 춤을 추고 있는 배우들, 그러니까 재은과 윤경과 재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힘이 솟아올랐다. 이사다는 극의 최종 장면인 커튼콜로 하여금 관객의 감정이 절정에 달하도록 만든다. 영원히 그곳에서 함께하고 싶도록, 한 세기가 지난 후에도 그 순간을 기어코 떠올리고 싶도록 만든다. 용기와 위로와 힘과 에너지와 웃음과 눈물을 내 손에 쥐어주는 무대를 보면서 나는 완벽히 그 공간과 그 공간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체 되었던 것 같다.
극장을 나오면서 극 속에서 시대 흐름에 맞추어 사용되었던 대중가요 음악들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곧장 이어폰을 끼고 그 음악들을 감상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덕수궁 돌담길의 반짝이는 조명을 보면서 하나 둘 하나 둘. 무거웠고 후련했다. 그 감정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커튼콜 영상을 몇 번이고 다시 돌려보다가 여운을 안고 잠에 들었다. 그 여운이 생각보다 오래가서 오래 울고 웃었다. 행복하게 우는 경험이 인생에서 몇 없었던 것 같은데. 이사다를 통해 나는 비로소 사랑으로 다듬어졌다. 오랜 기간 이리저리 주물리기도 했던 내 마음이 하나의 모양으로 빚어지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
'This Christmas' 노래가 깔리며 둘이 첫 키스를 나누던 장면을 반복해서 떠올린다. 노래 가사와 인물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순간 그 장면은 길게 남을 수밖에 없게 된다.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게 뭉클하게 느껴지면서도 재은의 "나 방금 성추행범 같았지." 하는 대사에 폭소했던 그 장면. 행복한데 안 행복하고 신나면서 슬펐던 장면. 끝내 사랑으로 빚어졌던 장면.
살아있는 여성 퀴어 커플의 이야기를 무대 위에 올려주어서, 모든 창작진 분들에게 감사하다. 살자. 살아서 행복해지자. 서로가 서로의 힘이 돼주고 사랑하는 사람을 아무 걱정 없이 사랑하자. 우리는 그럴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런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