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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이의 쇄골에는 무엇이 잠드는가

연극 <쇄골에 천사가 잠들고 있다> 리뷰

by GG

* 해당 리뷰는 2023년 03월 30일 - 04월 16일 사이에 상연되었던 공연 중 한 회를 관람한 후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어째서 천사는 쇄골에 잠들고 있는 것일까? 연극을 보기 전,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가장 먼저 찾아올 의문이다. 왜 하필 쇄골이며, 무슨 이유로 천사가 그곳에 잠들고 있는 걸까. ‘잠들어 있다’가 아니라 ‘잠들고 있다’라는,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현재진행형 문장을 사용한 것에도 의도가 있을지 추측해보게 된다. 이렇듯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이 제목은 연극의 러닝타임인 110분이 흐르고 나면 완전히 다른 감각으로 변모하여 관객의 마음 깊이 와닿는다.

연극은 크게 ‘부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부재’의 앞에는 상황에 따라 어떤 단어라도 자리할 수 있겠으나, 직관적으로 보자면 ‘누군가의 부재’를 뜻한다. 삶은 원하지 않는 상실의 과정을 버텨내야만 비로소 구색을 갖출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잔인하기도 하다. 집의 가장인 ‘키리노 켄토’의 장례식을 치루고 있다는 배경과, 켄토의 집 마당이라는 공간 안에서 신인 장례지도사 ‘사카모토 토루’와 켄토의 아들 ‘키리노 요시오’의 만남을 시작으로 상실을 받아들이는 인물들의 여정이 시작된다.


● 비로소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들, ‘마이너리티’에 대하여


무척 많은 것들을 쏟아내고 있어서일까. 연극을 보고 난 직후에는 감정이 제대로 갈무리되지 않아 힘들기도 했다. 연극에서 다뤄지고 있는 ‘성 소수자’, ‘길고양이와 인간의 공생’, ‘전쟁 난민’과 같은 요소들에서 나는 동시대성을 느꼈다. 근 몇 달간 여러 플랫폼들을 훑어보면서 한 번쯤은 본 이슈들이었다. 하나를 이야기하기에도 벅차다고 생각되는 문제들이 한곳에서 얽혀 자연스럽게 풀어지고 있었다. 성 소수자인 요시오는 길고양이처럼 방황하고, 길고양이들은 요시오처럼 주목받지 못하며, 전쟁 난민들은 요시오와 길고양이처럼 설 자리를 잃는다. 셋은 끊임없이 같은 궤도를 맴돌며 서로를 선행한다. 무엇이 먼저였을까? 무엇이 이 모든 문제를 파생하였나? 알 수 없다. 단지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문제를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위 연극은 끊임없이 현재와 과거를 오간다. 조명을 통해 시간대를 구분해주었으므로 이해하는 것에 지장은 없었다. 요시오는 생을 마감한 십 년 전에 머물러 있으며, 토루는 십 년의 시간을 거쳐 ‘장례지도사’가 되었다. 그들의 과거를 보여주는 극의 초반 부분에서 요시오는 길가에 있는 자전거를 훔친다. 토루는 그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요시오는 “우리는 촉법소년이기 때문에 처벌받지 않는다”라며 자신의 일탈을 이해받고 싶어 한다. 극의 중반 즈음에서 이러한 요시오의 행동을 돌이켜보며 “요시오의 일탈은 일종의 방어 기제였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요시오의 정체성은 일부 사람들에게 ‘잘못되었다’라고 멋대로 정의 내려지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사람들이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는 범죄 행동을 정당화함으로써, 혼란에 빠진 자신의 정체성을 무의식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안타까운 생각 말이다. 그렇게 요시오가 나름의 억지를 부리며 훔친 자전거의 주인은 요시오의 누나 ‘카즈에’였고, 후에 요시오를 온전히 이해해주는 인물 또한 ‘카즈에’ 뿐이라는 것이 몹시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요시오는 카즈에의 연대를 느끼고 나서 그녀의 자전거를 훔쳤던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았을까. 그러면서 또다시 무너졌을까, 요시오는. 그저 추측일 뿐이지만 가슴 한편을 솜으로 막아둔 듯한 기분이 든다.

요시오가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브래지어를 입고, 꽃무늬 유카타를 입는 것을 이해해주는 건 카즈에 뿐이다. 카즈에 또한 그녀의 친구 유우카를 오직 ‘친구로서’ 바라보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순간을 겪어서일까. 닮아있는 일련의 과정을 겪은 이들은 서로를 이해한다. 그러면서, 카즈에는 요시오에게 유일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카즈에는 죽는다. 요시오에게 그녀가 그랬듯, 그녀 또한 자신에게 유일했을 ‘유우카’의 신념과 같은 ‘길고양이 구하기’를 시도하다가 차에 치여 죽는다. 유일한 사람을 잃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렇게 요시오는 예고 없는 크나큰 상실을 겪으며 방 안으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요시오의 어머니 쿄코는 방관자다. 아버지 켄토는 일종의 가해자다. 유우카는 제 3자다. 토루는 요시오 삶의 독자였으며, 타쿠지는 동반자였다.

어쨌든 그 수많은 인물들 사이에서 ‘당사자’는 요시오 뿐이다. 그래서 요시오는 전쟁 중인 시리아로 향하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마이너리티’를 대변하겠다는 그의 결단은 결코 한순간에 내려진 결정은 아닌 것 같았다. 그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겹쳐본 종군 기자 타쿠지만이 동반자일 뿐. 현 사회가 그러하듯, 모든 인물은 요시오에게 특정 순간들에 가해지는 폭력이었다.


● 이들이 말하는 언어, “너의 쇄골에 카즈에가 잠들고 있습니다.”


카즈에를 잃고 절망하는 요시오에게 유우카는 말한다. 죽음이란 건 언어로 명명된 것일 뿐이라고. 그러니 명명된 것에서 벗어나 생각한다면 언제든 다시 카즈에를 마주할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며 “너의, 쇄골에, 카즈에가, 잠들고 있습니다.”라고 덧붙인다. 주제와 제목을 관통하는 대사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 세상에는 언어로 명명된 것들이 가득하다. 요시오의 정체성이 그렇고, 길고양이들의 존재가 그렇고, 전쟁 난민들의 실상이 그렇다. 그들은 언어 하나만으로 쉽게 혐오 당하고 쉽게 분류 당한다.

왜 ‘쇄골’이었을까? 연극을 보고 난 뒤 쇄골은 인종 간 차이점이 없는 유일한 뼈라는 사실과,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 굳이 ‘쇄골’이어야만 했던 것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러하다. 쇄골은 몸에서 거의 유일하게 움푹 파여있는 뼈가 아닌가. 또한 생각보다 연약한데, 우리는 생각보다 쇄골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무언가가 잠들기에 가장 적합한 부위라 느꼈다. 매일매일 들여다보는 건 너무 힘드니까, 적당히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잘 흘러넘치지 않을 것 같은 곳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잠들어 있다고 여기는 건, 삶을 살아감에 있어 커다란 동력이지 않을까.

언어라는 것은 이렇게나 유약하다. 무언가를 언어에 가두지 않고 바라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이 연극은 토해내듯 그에 대해 말하고 있다.


● 철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


극은 내내 ‘켄토의 집 마당’이라는 공간을 벗어나지 않지만, 간간이 그 마당을 감싸고 있는 철창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 그건 대부분 소리 혹은 조명으로만 표현될 뿐, 보여지지는 않는다. 그중 가장 강렬했던 건 단연 삼 분간의 암전 속에서 이루어지는 요시오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우연히 집 마당에서 만난 종군 기자 타쿠지를 만나 사진을 배우고 싶다는 요시오가 기꺼이 향한 곳은 시리아. 전쟁 중인 그곳에서 붙잡혀 고문을 당하다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전 속에서 감히 상상하고 예측한다. 요시오가 사진을 배워 그렇게 담고 싶어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아니, 애초에 사진이란 건 어떤 힘을 가지는가. 순간 포착되어 오래 기록되는 무언가. 사진은 ‘진짜’를 담는다는 타쿠지의 말속에서 요시오는 사람들이 말하는 ‘진짜’는 무엇인지, 그럼 ‘가짜’로 분류되는 자신은 무엇인지에 대해 몹시 갈증을 느꼈을 것 같다. 요시오는 자신의 존재론적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던 인물이었고, 그렇게 비로소 찾게 된 자신이라는 존재의 조각 일부분을 박제하듯 기록하고 싶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무엇보다 끔찍했던 그 장면은 철창 너머 아주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의 삶도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 밖에서, ‘철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 때때로는 애써 외면하고자 하는 일들이 현실에서 벌어진다. 철창으로 둘러싸인 무대 뒤에서, 아주 먼 그곳에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수많은 장소에서, 셀 수없이 많은 절규와 주목받고 싶어 하는 목소리들이 오간다.

‘비밀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컨테이너 박스 안의 공간도 어쩌면 ‘철창 밖’의 공간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곳에서 요시오는 본연의 모습을 마음껏 드러내며, 스스로를 틀에 가두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그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한다. 이렇듯 ‘철창 밖’이라는 공간은, 가장 자유로우면서도 가장 보호받지 못하는 아주 날것의 공간이다. 이 모든 공간의 분리는 조명만으로 아주 섬세하고 과감하게 표현되는데, 때에 맞춰 거침없이 변하는 조명이 숨을 턱 막히게 할 만큼 강한 효과를 준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위 연극은 조명 외에도 특정한 테마 음악으로 분위기를 조성한다. 음악을 듣고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우울’이었지만, 곧 음악은 ‘천국’이라는 장소를 연상케 한다. 무대 또한 마찬가지다.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연극에서, ‘살아있는’ 인물들이 무대 위에서 숨 쉬고 있기 때문일까. 일정한 회색빛 톤의 배경들과 투박한 소품들이 규칙 없이 자리하고 있지만 어딘가 편안하게 느껴진다.


● 반복되는 부재, 그렇게 남은 이들은


카즈에의 부재를 겪은 요시오도 결국에는 누군가에게 불멸의 부재가 되고 만다. 상실을 겪고 성장한 이가 또 다시 누군가의 상실이 됨으로써 부재와 함께 성장 또한 반복된다. 여덟 명으로 시작했던 인물이 네 명이 되고, 남은 넷은 떠나간 넷을 기억하기 위해 서로의 방식으로 고군분투한다. 떠난 이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내고 싶은 사람, 그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 장례지도사가 된 후에야 비로소 떠난 이를 진정으로 마주하게 된 사람…. 애도는 완결되는 것이 아니므로 끊임없이 지속된다. 제목에서 사용된 현재진행형 문장 또한 ‘지속됨’을 표현하기 위해서이지 않았을까, 라는 추측도 해보게 된다. 남은 이들의 삶은 곧 우리의 삶과도 같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그들을 애도해야 하는가. 이 연극을 보고 난 후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삶을 대해야 하는가. 카즈에가 선물해준 유카타를 입고 토루의 쇄골에 깊게 잠든 요시오를 보여주며 극은 엔딩을 맞이한다. 극장을 나올 때의 우리의 쇄골에는 수많은 부재들이 눌러앉는다. 그 상태로 영원히 잠든다. 거울을 보지 않는 이상 나의 쇄골을 들여다볼 일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거울이라는 사물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꾸준히 쇄골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것이 남은 이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사명이라고, 이 연극에 대한 나의 답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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