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어 눈을 살며시 뜨니, 가장 먼저 눈앞에 화장실 문이 들어온다. 좁은 원룸에서 늘 보던 익숙한 풍경. 고개를 돌려 곤히 잠든 아내를 쳐다보고 나서야, 이곳이 내가 익숙했던 그 원룸이 아닌 ‘조리원’이라고 불리는 고급 원룸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아내는 조리원 생활에 한없이 만족스러워했다. "밥이 맛있고, 고층 풍경이 좋고, 마사지도 최고"라는 긍정적인 표현이 입에서 수시로 흘러나왔다.
출산이라는 큰일을 치르고 해방감과 기쁨에 신난 아내가 옆에 있으니 내색하진 않았으나, 나는 원룸이라는 이 공간 자체가 꽤나 힘들었다. 20대 초반부터 근 10년을 원룸에서 지냈다. 그곳은 치열한 삶의 무게와 많은 시련을 겪었던 공간이었기에, 나에게 원룸은 '거주 공간'이라기보다는 '근근이 삶을 이어나가는 최소한의 쉼터'에 가까웠다. 화려한 시설을 갖춘 이곳 역시 본질은 같았다. 벽에 갇힌 채 창문만 바라보며 쉬어야 하는 환경. 하지만 지금은 아내의 회복과 아이가 우선이었기에, 나는 그 익숙하고 답답한 기분을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내는 자리 비우는 일이 잦았다. 아이 수유, 각종 산후 교육, 그리고 마사지까지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그 와중에 아내는 아이를 우리가 거주하는 호실로 최대한 자주 데리고 오자고 했다. 처음에는 유난떠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꼼지락대는 아이를 계속 품에 안고 시선을 마주하다 보니 아내 말을 따르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영상 통화 중 장모님의 한 마디가 이러한 행동에 결정적인 힘을 보탰다. 아이를 신생아실로 내려보내는 순간이었는데, 장모님께서는 태어난 지 1주일밖에 안 된 아이가 벌써 '기숙사'로 가냐며 농담을 던지셨다. 나는 왠지 그 말이 마냥 웃기지만은 않았다. 이제 막 태어난 생명이 단지 우리 부부의 편의때문에 내려 보내지는 것 같아 마음이 괜히 불편했다. 그날 이후, 아내가 시키지 않아도 나는 굳이 아이를 호실로 데려와 내 몫으로 돌보기 시작했다.
조리원 생활의 하이라이트는 불꽃놀이였다. 애초에 출산 예정일이 10월이었기에, 혹시 조리원에서 여의도 불꽃축제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정말 시기가 딱 맞아떨어졌다. 아이를 품에 안고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63빌딩과 화려한 불꽃놀이는 아내에게 조리원에 대한 만족감을 배가 시켜 주었다. 나 또한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고 이후에도 잊지 못할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그러나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고 터져 오를수록, 나는 그 강렬한 아름다움 속에서 왠지 모를 역설을 느꼈다. 좁은 원룸 안에서, 자유롭게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태로,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의 창문을 통해 서울의 가장 화려하고 대중적인 축제를 보고 있다는 사실. 고급스러운 시설과 서비스에 둘러싸여 있지만, 나는 여전히 갇혀 있었다.
"호화스러운 감금." 그 불꽃이 터지는 순간, 나는 내가 처한 이 모순적인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하는 그 단어를 떠올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