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단이아빠 Mar 03. 2024

핏덩이

고향 어른들은 어린아이를 지칭할 때 핏덩이라는 표현을 쓰곤 했다. 비유적으로 쓰는 말임을 알지만 피라는 단어를 아기를 지칭하는데 쓴다니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괜스레 반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아내의 출산과 함께 180도 바뀌게 됐다.


새벽부터 시작된 아내의 진통은 어느덧 저녁 6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첫 내진 시 주치의는 저녁은 편하게 드실 수 있겠다며 빠른 출산을 기대하게 했으나 예상과 달리 인내의 시간은 계속 이어졌다. 통증에 신음하는 아내가 당연히 가장 힘들겠지만 그걸 옆에서 12시간째 지켜보고 있는 나 또한 속이 말이 아니었다. 아내의 표정이 찡그려질 때면 괜히 아이를 갖기로 한 건가라는 후회가 밀려오기까지 했다. 물리적인 고통과 복잡한 심경을 뒤로한 채 마음가짐을 다잡은 지 10분 후, 갑자기 아내는 분만실로 옮겨졌다. 드디어 때가 된 것이다.


아내를 먼저 분만실에 보내고 나니 초조함이 몰려왔다. 의료진이 바빠서 그런 건지 원래 그런 건지는 모르겠으나 보호자에게 출산 과정에 대한 안내는 전혀 없었다. 남편은 계속 기다리기만 하는 건지, 분만장에 출입을 시켜주는지 등 궁금증 투성이었으나 혹여나 아내에게 가야 할 의료진의 의식이 분산될까 싶어 죄없는 손톱만 물어뜯었다. 아내 없이 입원실에 대기한 지 20분쯤 지났을까? 간호사 한 명이 다급히 다가와 바로 분만실로 가라는 말을 전했다.


분만실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풍경은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의학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샤프한 느낌보다는 동네 의원급 처치실같이 꽤나 사람냄새가 나는 모양새였다. 아내는 나를 볼 틈도 없이 출산을 위해 집중하고 있었다. 아내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마주하니 또 다시 죄책감이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주치의가 의자 밑에서 무언가를 쑥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란 것도 잠시, 핏덩이 하나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 핏덩이는 큰 울음소리와 손짓, 발짓으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있었다. 분명 수 분전까지만 해도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였었는데 그 핏덩이가 마치 빗물을 쓸어 내리는 와이퍼처럼 복잡한 내 머릿속을 한 번에 씻겨 줬다. 옆을 돌아보니 안도의 눈물을 흘리는 아내, 큰 소리로 우는 아들, 그 모습을 보고 왈칵 눈물을 쏟아내는 나까지...이렇게 울보 3인방은  가족이 되었다.


이후 아기 신체확인, 탯줄 절단 등 절차를 밟고 먼저 분만실 밖으로 이동했다. 복도에 앉아 출산 상황을 상기하던 중 핏덩이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어른들이 입에 올릴 때마다 괜히 싫었던 그 단어를 내가 내 아이를 처음으로 지칭하는 데 사용했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났다. 그제서야 핏덩이라는 말은 아이를 처음 맞이하는 부모의 심경을 원초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이해가 생겼다. 역시 사람은 경험한 만큼 보인다는 깨달음과 함께 아빠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일요일 연재
이전 01화 조카는 원래 예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