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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정 Feb 16. 2022

음식의 아름다움

미식가를 부러워하며

“물맛이 나네” 김치찌개를 먹다 큰 애가 느닷없이 반찬 투정을 한다. ‘물맛!’ 찌개는 물을 넣고 끓이기는 하지만 ‘찌개에서 물맛이 난다니’ 듣도 보도 못한 말에 어이가 없었다. 괜한 음식 투정에 장모님이 무안하실지 몰라, “맛만 있구먼!” 불평을 차단한다. 나름 진실을 말했지만 제압당한 것이 못내 억울한 첫째는 쌍둥이 동생에게 도움을 청한다. 둘째도 “맞아! 물맛이 나!” 맞장구를 친다.

     

 물 넣고 원재료와 갖은양념을 넣고 끓이는 찌개는 원재료의 풍미와 양념으로 새로운 맛이 나기 마련인데 물맛이 난다고 하니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살면서 물 이외 음식에서 물맛을 느껴본 적이 없기에 첫째의 진실 어린 주장이 생뚱맞아 무시하려고 해도 찌개에서 물맛을 찾아낸 쌍둥이 아들의 미각이 대단하게 여겨졌다. ‘그런 맛을 어떻게 알았을까?’     


 광주에서 와이프를 만나 결혼하기 전, 서울에서 부모님과 생활할 때는 음식의 맛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다.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이 특별히 맛이 없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아버지 역시 음식에 대해 타박 없이 드셨기에 가족들 모두 맛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지냈다.     


 음식의 맛에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은 감각보다는 이성이 더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어릴 적 이것저것 아무거나 골고루 먹어야 어디에서도 잘 적응한다는 어머니의 가르침과, 맛이 없다고 불평을 하노라면 ‘대충 먹으라’는 말로 정리되는 상황에 자연스레 적응했던 것 같다. 더불어 머리가 커지면서 남자가 음식의 간이나 맛을 평한다는 것은 좀스러워 보였고, 음식을 해온 여자의 노고와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스스로 맛에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아온 것 같다.     


 직장에 들어와서야 내가 다른 사람과 달리 맛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것을 느꼈다. 같이 식사하고 나서 음식의 맛을 묻는 동료들의 질문에 “괜찮은데요”라는 무미건조한 답변이 반갑지 않았나 보다. 음식의 맛에 공감하고 싶었는데 시답지 않은 답변은 기대에 어긋나고 공감 능력이 떨어진 자로 느껴지고 있었던 것 같다. ‘저는 괜찮던데요’라는 잦은 기계적인 답변을 통해 선배는 결국 내가 맛을 잘 모른다는 것을 간파했다. ‘맛있는 것을 먹을 자격이 없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잘 먹는, 까탈스럽지 않은 무난한 사람이라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정작 맛을 모르는 이유는 딴 데에 있었다. 어릴 적 잦은 코감기로 냄새를 못 맡을 정도로 후각이 안 좋다 보니 맛을 잘 모른 것이다. "맛의 원리"라는 책의 저자는 사람은 오감을 혀로 느끼지만 수만 가지 음식의 다양성은 전적으로 향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코에는 약 400종의 수용체가 있어 400종의 냄새를 조합해서 약 1조~10조 가지 정도의 냄새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 엄청난 가지 수의 맛을 아는데 후각은 절대적인 것이라 하겠다.


 음식 맛에 서서히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처가가 광주다 보니 자연스레 접하는 남도의 음식 맛과 수술로 회복된 후각 기능이 어느 정도 일조를 했다. 장모님의 음식 솜씨가 좋고 와이프도 맛을 잘 알아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보다 더 맛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레 입맛이 점차 높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가끔 처갓집에서 식사를 할 때면 내 입에는 다 맛있는 장모님 음식 앞에서 와이프부터 처형들은 “약간 시큼하다”, “생강을 좀 더 넣어야 했는데.....” 분석을 해가며 식사를 한다. 음식의 향연 앞에 즐기기 바쁜 나로서는 먹는 내내 ‘그런가?’ 하는 의구심만 가져볼 뿐이다. 그러면서 음식 앞에서 까탈스러운 자와 미식가에 대한 경계가 애매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저런 세밀한 맛을 알 수 있을까?’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내가 모르는 다양한 맛의 세계를 알고 있음에 부럽기까지 했다. 각종 음식 방송에서 연예인들이 시식하며 맛에 대해 표현하는 것을 과장된 것이라 치부했었다. 너무 맛있어 어쩔 줄 몰라하는 작위적인 모습과 과장된 표현에서 진정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느끼고 경험하지 못했다고 존재하는 다양한 맛의 세계까지 부정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하게 된다.

   

 음식의 맛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내가 음식을 만들게 되면서부터다. 연이은 주말부부의 생활로 인해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생존과 ‘까짓 한번 해보자’라는 도전정신, ‘유튜브’의 도움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볶음밥과 된장국, 북엇국, 김치찌개 등 비교적 간단한 것부터 가지볶음, 닭가슴살 요리 등 조금씩 확장해 나가고 있다.     


 음식을 하면서 맛의 변화가 굉장히 민감하다고 느꼈다. 약간의 간장이나 소금을 넣었을 뿐인데 기본 맛이 확 바뀌어 당황했던 적이 꽤 있다. 이렇게 저렇게 해도 안되면 결국 화학조미료의 도움으로 맛을 내도록 하지만 재료 본연의 맛이 없어져 아쉬웠다. 민감한 맛의 세계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재료에 따른 처리방법, 궁합에 맞는 재료와 양념, 맛을 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알면 알수록 과학이고 예술이라고 느껴졌다.      


 어느덧 남도 음식에 익숙해지고 음식을 하게 되면서 맛을 알게 되어 그런지 밥때가 되면 맛집을 찾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대충 한 끼 때우는 식의 사고에서 진전된 모습이다. 미식가(美食家)에서 미는 맛 미(味)가 아니라 아름다울 미(美)다. 음식이 아름다운 것을 아는 자가 미식가라 하겠다. 맛이 있고, 없음의 단순 이분법적 세계가 아닌 미각과 후각, 뇌의 인식 작용을 거쳐 이루어지는 맛의 세계를 아는 것은 인간만이 느끼는 오묘한 과학의 세계이다      


 인간이 음식의 맛을 느끼며 맛있게 먹으려는 것은 인간 생존을 위한 것이라 한다. 먹는 음식이 맛이 있어야 계속해서 음식을 섭취할 것이고 생존에 필요한 음식을 먹게 만들도록 한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자의 주장이다. 그런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는 것은 즐거움이고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고 하니 맛을 아는 자는 행복함을 자주 느낄 수 있는 자이다. 비록 산해진미(山海珍味)가 아니더라도 소박한 음식에서 음식의 아름다움을 알고 행복감을 느낀다면 우리의 삶이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풍성한 삶을 위해 신비한 맛의 세계에 앞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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