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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정 Feb 24. 2022

낭만적 사랑에서 진정한 사랑으로

결혼을 앞둔 후배에게

 청첩장을 받았다. 평소 아끼던 후배가 이달 말 결혼을 한다는 것이다. 외모나 성격, 학벌 등 빠질 것이 없는 친구인데 인연을 만나지 못해 안타까웠다. 몇 년 전 아는 지인을 소개해 준 적이 있었다. 잘 안된 것을 보고 괜한 짓을 했나 하는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런 그가 마흔을 앞두고 결혼을 한다고 하니 만혼(晩婚)의 경험자로 진심으로 축하를 해주고 싶다.      


 인연을 만나기까지 후배는 수 없는 만남과 이별, 주위의 온갖 성화가 있었을 것이다. 결혼이 늦었던 나 역시 그러한 과정을 거쳤기에 그가 겪었을 시련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왜 결혼 안 하냐?’, ‘언제 결혼해?’라는 말이 당사자에게 스트레스라는 것으로 인식되어 조심스러운 말이 되었지만, 전에는 인사치레로 흔한 말이었다.

     

 ‘결혼 적령기’라는 말이 당시 사회적으로 널리 사용되었기에 결혼이 늦어지는 나에게 ‘결혼’은 늘 따라다니는 대화거리였다. 친구, 지인들과 가벼운 술자리, 직장 내 회식 자리, 심지어 외부 기관 사람들과 같이하는 식사 자리에서도 내 결혼 이야기가 도마 위에 오른다.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냐?”, “눈이 높다.”, “패션이 문제다” 등 다들 한 마디씩 거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장남과 진심의 경계선에 놓인 애매한 상황을 같이 즐기곤 했다.

     

 그런 상황을 겪다 보니 내심 ‘얼른 좋은 사람과 결혼해야지!’라고 다짐 아닌 다짐을 했었다. 그러면서 ‘좋은 사람을 어떻게 고르지?’, ‘결혼 생활은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등에 대해 고민도 하고, 결혼 관련 서적도 3권 읽으며 나름의 ‘결혼관’을 세우기도 했다. 결국,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서로의 발전을 위해 상호 도와주어야 하며, 맞벌이를 원한다면 맞살림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혼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기보다 일종 거래와 비슷하다. 인류가 정착 생활을 하면서 가족 구성원은 노동력의 원천이었다. 여성을 시집보낸다는 것은 그만큼 노동력 부족이 발생하기에 그에 합당한 값을 치러야 했다. 구약성서에서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14년간 머슴살이를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장가간다.’라는 말의 의미는, 데릴사위로 처가에서 일정 기간 일 해주고 신부를 데리고 온 것이다.

     

 14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 ‘라스트 듀얼(최후의 결투)’에서 주인공 맷 데이먼은 결혼지참금으로 땅을 받지 못하자 장인에게 불만을 표한다. 이에 장인은 역으로 주인공에게 ‘무엇을 줄 것이냐?’라고 묻는다. ‘명예로운 이름을 주죠!’ 처가의 반역자 낙인을 씻게 해 준다는 것이다. 신랑과 장인이 서로 간의 잇속을 챙기고 그것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는 신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서양의 중세나 불과 1세기 전 우리나라에서도 혼인은 당사자를 제외한 집안의 결정으로 이루어졌다. 사랑은 일단 결혼이 성립한 다음, 그다음에 전개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결혼이 사랑을 전제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낭만적인 생각은 인류 역사에서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맘에 없는 생면부지의 사람과 살을 맞대고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거역할 수 없는 종교적, 이념적 이데올로기에 갇혀, 적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던 그 당시의 상황이 암울할 따름이다. 시작부터 희생과 불만족이 가득하였기에 결혼 생활이 즐거울 리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요즘 사회에서도 여성의 경우 결혼 만족도가 10점 만점에 평균 6.8점(2019년 여성 가족 패널조사 결과)이라고 하니 과거는 더 말해 무엇하랴.

     

 오늘날 낭만적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결혼도 실제 이면에는 상대의 조건을 따지며 거래하는 옛 모습이 남아있다. 자신의 교환가치를 높여 그에 합당한 배우자를 만나려 하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상대를 통해 메우려는 계산적인 모습이 숨어 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서로 최상의 대상을 찾아냈다고 느낄 때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질 수 있다”라고 한다. 이 말을 부정할 수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상을 고를 때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선택의 기준은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되어 결혼으로 성사되지만, 차츰 냉혹한 현실에 부딪힌다. 선택의 기준이 생각만큼 아니거나, 기준 이외 생각지 못한 다른 모습, 선택의 기준 안에 숨어 있는 자신의 콤플렉스가 부메랑으로 날아와 자격지심이 될 수 있다. 남부럽지 않은 결혼이지만 이면에는 불만과 불안이 싹트고 있을 수 있다.

      

 진화생물학자인 최재천 교수는 요즈음 결혼에 대해,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일반적 기준치가 너무 높아서, 그 기준치에 도달해서 결혼한다는 것이 너무 어려워지고 있다”라고 한다. 젊은 세대들이 결혼 비용은 물론 출산, 육아, 교육 등 계산해야 할 비용이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이제 결혼은 자신의 교환가치를 높여 최상의 대상을 찾는 것은 물론이고, 이에 수반되는 각종 비용 등을 생각하고 감당할 수 있는지까지 고려의 대상인 된 것이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혼인율이 매년 낮아지고 OECD 국가 중 최하위의 출산율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 결혼을 선택하게 된 후배의 결혼이 대견하고 애국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결혼 생활이 녹록지 않기에 상대의 덕을 보려는 마음, 기대하고 바라기보다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 서로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마음 등이 필요할 것이다. 결혼 생활은 낭만적 사랑에서 진정한 사랑으로 진화하는 과정이기에 그 사랑을 키워가는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얼마 전‘결혼은 여자가 손해’라는 아내의 말에 나는 아무 반박을 하지 못했다. 집에서 음식도 하고 설거지도 해서 스스로 괜찮은 남자로 여기고 있었는데, 정작 아내는 내심 불만이 많은가 보다. 여자가 맞벌이하며 가사노동과 육아, 남편까지 챙겨야 하는 부담감은 아무리 남자가 같이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 한계 안에서 가사(家事) 도우미로만 있었던 나에게 아내는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이번에 결혼하는 후배는 나와 같은 소리를 듣지 않았으면 싶다. 결혼 생활을 아무리 잘한다 해도 상대적이다 보니 쉽지 않다. 그래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노력을 한다면 결혼 생활이 진정한 사랑으로 가득 차리라 생각한다. 선배로서 잘하고 있지 못하지만 앞으로 잘해보려는 마음으로 후배에게 이 말을 전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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