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빙 로봇이 식당 안을 돌아다닌다. 얼마 전 오랜만에 가족들과 같이 패밀리 레스토랑을 갔을 때였다. 여느 뷔페식 식당과 다를 바 없었지만, 로봇이 돌아다니는 모습은 낯설었다. 로봇의 화면 아래에 빈 접시를 담을 수 있는 함이 있었다. 음식을 먹고 빈 그릇을 치우려면 식탁 위 호출 버튼을 누른다. 로봇이 알아서 찾아온다. 사람은 빈 그릇을 로봇에 붙어 있는 통에 놓고 확인 버튼을 누르면 로봇은 알아서 제 갈 길을 간다.
식사를 하면서 나도 해봐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호출 버튼을 눌렀다. 용케 사람들과 부딪힘 없이 내 자리로 로봇이 왔다. 빈 접시를 담아 놓고 확인 버튼을 찾는데 잠시 머뭇거렸다. 무의식적으로 몸체 위나 옆, 아래를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있던 처남이 스크린에 있는 확인 버튼을 알려주었다. 사실 처남도 몰라 헤맸었다고 한다. 8살 먹은 작은 아들이 스크린에 있는 확인 버튼을 눌러 알게 되었다며 나의 어색함을 무마시켜 주었다.
나와 처남은 아날로그적인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동안 사용했던 전자제품은 대체로 몸통에 작동 버튼이 있었기에 무의식적으로 몸체 어디인가에 있으리라 생각했었던 것이다. 요즘 제품은 화면을 통해 자신의 여러 가지 기능을 제시하거나 알고리즘에 따라 선택하도록 화면 터치 방식으로 작동이 된다. 어린 조카는 화면 터치를 통해 작동되는 메커니즘에 익숙했던 터라 화면에서 쉽게 찾은 것 같다.
예전에는 식당에 빈 그릇을 치우는 직원들과 음식을 가져오는 사람들로 붐비었다, 지금은 일하는 사람이 줄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직원 채용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사람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과거 페스트 창궐 후 인력이 귀하다 보니 농노제가 폐지된 것처럼 코로나 19도 사회를 변화시킨 것 같다. 전염병으로 사람이 귀해진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어릴 적 로봇은 지구를 지켰다. 만화 영화 속의 로봇은 거대하고 멋졌다. 마징가 제트, 로봇 태권 V는 그 당시 어린이의 우상이었다. 안방의 TV나 극장의 스크린에서 우리의 영웅이 나타나면 환성이 터져 나왔다. 극적인 순간에 어김없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레이저 빔, 미사일, 태권 동작으로 상대방을 제압해서 외계의 침략군과 악당들을 무찔렀다. 세계 평화를 지켜낸 것이다. 그 당시 국회의사당의 뚜껑이 열리면 태권 V가 나타난다고 하기에 우리나라에 로봇 태권 V가 있다는 소문을 반신반의하며 믿기도 했었다.
로봇은 이제 더 이상 지구 평화를 지켜주지 않는 것 같다. 식당 안에서 서빙을 하거나 국수를 말아주거나, 입력된 레시피에 따라 볶음밥을 만드는 우리의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현장에 등장한 것이다. 도요타 자동차 공장이나 기아자동차 공장에서 로봇 팔이 조립, 용접 등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자동차 공장이라기보다는 로봇 공장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이곳저곳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다행히 외계 침략이나 악당의 공격이 없어 로봇 태권 V를 만들지 않아도 되었다. 로봇은 생산성 향상, 인간 노동의 대체라는 새로운 수요에 의해 공장이나 식당 등 우리의 일상에서 나타났다. 로봇의 등장으로 환호했던 추억 속의 로봇은 크고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었다. 현실 속의 로봇은 작고 볼품없지만, 일자리 경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감출 수 없다.
인터넷과 ‘크로스 사이언스’라는 책에 의하면, ‘로봇’이라는 말은 체코어 로보타(robota)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극작가인 카렐 차페크가 출간한 R.U.R(Rossum’s Universal Robots)라는 희곡에서 로봇이 등장했다. 로봇은 ‘고된 노동’이라는 뜻으로 고된 노동을 인간 대신 짊어지게 하려고 로섬이라는 과학자가 로봇을 발명한 것이었다.
희곡에서 로봇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대체해 일을 하다 보니 점차 소수의 사람만 일하고 나머지는 빈둥빈둥 노는 풍요로운 사회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로봇 생산 공장에서 이상한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로봇이 인간을 공격하여 인류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갔고, 마지막 남은 인간이 로봇을 없애려 하다 포기하고 로봇에게 지구의 주인 자리를 넘겨준다는 이야기였다.
1920년대에 나온 이 희곡은 당시 영국이나 유럽 전역에 공연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35년 전 우연히 친구들과 비디오로 봤던 ‘터미네이터’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잘 만든 영화였고 보는 내내 흥미진진했다. 재미가 있어 몰입해서 봤지만 끝난 후 충격과 찝찝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당시 공연을 본 사람들도 그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은 기계의 높은 생산성으로 일자리를 위협하자 노동자들이 일으킨 기계 파괴 운동이다. 자본가의 생산수단을 파괴함으로써 인간의 위치를 되찾으려는 노력이었지만 변화의 큰 파고에 인간은 어쩔 수 없었다. 이후 인간은 적응해 가며 기계와의 공존을 추구하였다. 기계 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며 인류는 또 다른 번영의 길을 걸어왔다.
이제 인류는 로봇과 인간의 공존을 고민하게 될 것 같다. 로봇은 AI의 발달로 기계화, 자동화보다 훨씬 고차원인 능력을 보유할 수 있을 것 같다. 로봇을 보유한 자본가는 더욱 부를 축적할 것이고, 하층 노동자뿐만 아니라 기술직, 전문직 종사자마저도 위협을 받게 될 것 같다. 로봇으로 향상된 서비스와 제품 공급의 과잉을 해소할 충분한 수요가 없을 경우 과연 인간이 빈둥빈둥 놀 수 있는 유토피아적 삶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먹다 남은 음식과 빈 그릇을 로봇의 통에 담을 때 누군가 ‘눈치 안 봐서 낫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음식을 남기면 서빙하는 종업원의 눈치가 보였는데, 로봇이 서빙하니 음식 버리는 데 자유롭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버린 음식이 이전보다 많아졌다. 순간 황폐해진 지구에 인간이 돌아올 때까지 쓰레기를 치우는 영화 로봇 ‘월-E’의 모습이 떠올랐다. 쓰레기만 남은 지구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근거 없는 막연한 두려움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쉽고 편리하게 얻고 사용하려는 인간의 욕구에서 디스토피아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나만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