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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다고 Mar 07. 2024

나뭇잎이 동그랗다면

다르게 상상해 보기

1. 산이 있으면 나무가 있다


군대 복무 시절의 어느 날이었다. 사단장 관저 일대의 낙엽을 한 데 모아 버리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사단 참모부에서 행정병으로 근무하던 나는 마침 일거리도 잠시 소강상태였기에, 산책을 겸해서 다녀올 생각으로 작업에 자원했다. 사단장 관저라고 해봐야 작은 단독주택 규모라는 짐작으로 참여한 것인데, 직접 가보고 나서 내 선택을 후회했다. 함께 간 후임병들에게 당시에 했던 말이 기억난다.


"얘들아. 산이 있으면 나무가 있고, 나무가 있으면 낙엽이 있는 건 자연의 섭리 아니냐? 지금 저 낙엽을 다 쓸어버리라는 건, 자연에 대항하라는 것 아니냐?"


지금 와서 생각하니 참 당연하고도 우스운 말이다. 아무튼 그 관저 일대는 그야말로 산 전체여서, 우리는 저녁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취침 전까지 내내 낙엽을 마대 자루에 모아 버려야 했다.


그때 나는 한참을 작업하면서 왜 나뭇잎들은 구(球: sphere)가 아닌 걸까 생각했다. 낙엽이 알아서 굴러 저지대로 모이면 얼마나 편할까.


상상해 보자. 가을에 알록달록한 구들이 산자락 아래로 굴러내려 오는 모습을. 빨간 공, 노란 공, 갈색 공. 형형색색의 공들이 낮은 곳을 향해 굴러가 모이는 모습을. 마치 키즈카페의 볼풀장 같을 것이다.


그때는 짜증 섞인 상상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소재로 작업할 생각으로 즐겁다.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초현실적인 미감이 되지 않을까.


르네 마그리트, <심금>, 유채, 1929


2. 낙엽은 비에 쓸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군시절의 일이다. 어느 날 밤새 비 온 뒤의 아침, 당직사관이 스피커를 통해 전파했다.


"금일 아침 점호는 없다. 각 생활관별로 빗자루를 지참하여 근무 최소인원만 제외하고 막사 앞으로 집합."


그날은 토요일이라 사무실 근무가 없었기에 우리는 모두 푸념을 하며 모였다. 각자의 손에 플라스틱 비를 하나씩 쥐고. 주말 휴식 시간의 상당 부분을 비질로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답답해졌다.


쓱싹쓱싹.


모두가 말없이 비질을 하는 동안 고개를 들어 연병장을 봤던 순간이 떠오른다. 가을이 깊어 가며 진한 퍼머넌트 옐로로 익었던 가로수 은행잎들이 온통 떨어져 있었다. 물감을 풀어놓았다는 표현이 딱 맞는 순간이라고 느꼈다.

 포스트잇에 사연을 적어 붙인 듯, 도로의 바닥에 노란 은행잎들이 무수히 붙어 있었다. 한 장, 한 장 정성껏 붙여 놓은 것 같은 분위기는 참 좋았다.

 그런데 이 포스트잇들이 지지리도 더럽게 안 떨어진다. 아무리 빗자루로 쓸어도 찰싹 달라붙어 척척하게 젖어 있는 은행잎들.

 밤새 내리는 비에 나무에서 떨어졌지만, 내가 휘두르는 비에는 도무지 쓸려나가지 않음이 야속했다.


르네 마그리트, <겨울비>, 유채, 1953


3. 그때그때 다르다


나뭇잎이 동그랗다면, 낙엽을 치우는 수고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무가 자랄 수 없었겠지.

은행잎이 포스트잇이었다면 처음부터 비질하러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감상도 없었을 테지.

 

관점을 달리 하면 보는 것도 달라진다.

낙엽에만 집중하면 나뭇잎이 떨어진 나무는 앙상한 가지 투성이의 생선뼈다귀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선을 넓게 가져보면 다른 감상을 느낄 수 있다.

바로 나뭇잎이 진 자리를, 하늘이 와서 채우는 것이다. 참 관심을 좋아하는 하늘이다.


그림을 그리는 시선도 그렇다. 어디에, 무엇에 관심을 두는가. 그것에 따라 작품의 결과가 달라진다. 그림을 보는 눈도 같을 것이다. 형식과 내용, 배경지식을 자세히 알고 보느냐, 자신만의 취향이나 감성을 가지고 보느냐. 데 페이즈망(dépaysement : 있어야 할 것이나 장소가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을 배치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진 초현실주의 작품들처럼.


이렇게 하나씩 다르게 상상해 보자. 뭔가 내면에서 다른 것이 꿈틀거릴지 모른다.



※메인 이미지 : 조르주 데 키리코, <사랑의 노예>, 유채, 1914,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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