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를 주고받는 사회
1. 이탈
얼마 전, 참여하고 있던 프로젝트에서 이탈했다. 이유는 많았다.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던 그들의 말은 그저 공중에 뿌린 스프레이처럼 흩어져 가고, 시간이 갈수록 디테일이 달라져 갔다. 점점 나와 그들 사이에 깊은 골이 파였다. 약속과 계약에 대한 개념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역시 가장 큰 이유는, 노력을 들인 결과물에 대한 대가 지불이 지체되는 것이었다.
가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술에 왜 돈이 개입하느냐."
"순수하게 불타오르는 예술혼으로 작업하는 것이 예술가의 본분 아니냐."
"세속적인 이유가 예술보다 앞서는 건 문제 아니냐."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몰지각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미술의 역사, 특히 현대 미술의 역사에서 미술 자체에 주안점을 둔 순수 미술의 등장 때문이다. 제도화되고 규격화된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부정의 미학이야말로 현대 미술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귀족 사회에 대한 동경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부르주아지의 취향은 아카데미와 고전주의였고, 자본과 제도로 찍어 누르는 미술에 저항하던 것이 낭만주의와 초기 모더니즘의 선배들이었다. 그러니 돈이란 것은 낭만을 더럽히는 세속적 물질처럼 느끼는 시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술가도 엄연히 사회인이다. 계약과 약속 가운데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것은 예술을 한다 해서 특별히 다르지 않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기성품이 아닌 유일무이한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 뿐, 미술 시장이라는 자본 그라운드에서 제품으로 기능하는 것은 미술품도 다를 바 없다.
그런데 대가 없이 입에 거미줄 치며 그림을 그리라니.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생각인가 싶다. 수백 년 전, 르네상스 이전의 미술가도 그렇게 살지 않았다. 후원과 의뢰를 받아 조각을 하고 벽화를 그렸다. 어쩌면 생존권만큼은 현대를 살아가는 작가들보다 훨씬 보장된 세계였을지 모른다. 그렇다 해서 그들이 만든 작업물이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저열한 작품으로 인식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자명하다.
2. 예술가 직업에 대한 적성
“너는 작가로 살아가는 것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작품을 만드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게 특별히 다른 직업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야.”
"돈을 벌고 싶다면 그런 일을 하면 돼."
함께 작업하던 선배 작가가 이렇게 말했다. 일부분은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다만 의미가 다를 뿐이다. 나는 타인의 시간과 노력을 당장의 주머니 사정보다 뒤로 하는 사람들의 행태에 순응할 마음이 없다. 그가 말하는 작가라는 것이 오직 작품만을 생각하고 대가는 바라지 않는 것을 뜻한다면, 나는 그의 말대로 작가의 삶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이 작가라면, 나는 작가가 되는 것을 거부하겠다.
현대 미술의 자리를 만들어 준 부정의 미학이, 왜 그들의 사정에는 적용되지 않는 걸까? 그런 모순을 깨닫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실망이 아닌 애잔함을 느낀 것이다. 심지어 그는 자기 작품을 열심히 제작하고 있지도 않았다. 따라서 나는 내 생각과 의지로 내 작품을 만들어가는 것에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프로젝트에서 이탈해 독립하게 된 진짜 이유다.
3. 현재
나는 거의 매일 글을 쓰고 있다. 주제는 다양하다. 오랜만에 주어진 환경적 자유를 즐기는 가운데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 그리고 도서관의 책들에 인격을 부여한 동화를 쓴다. 또는 그림을 그리는 방법론적 연구에 대한 글을 쓰고, 현실을 벗어났지만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웹소설을 쓴다. 본분대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드로잉을 하며 환상을 그리고, 그것을 더욱 구체화할 에스키스를 남긴다. 물론 이것이 당장의 수입을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믿는 것은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또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은 만큼, 하고 싶을 때에 내 뜻대로 할 수 있다는 것. 우리는 그것을 자유라고 부른다.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한 이후로 얻기 위해 가장 많이 피 흘린 가치가 바로 자유다. 누군가는 이것을 위해 목숨도 바쳤는데, 주말이나 평일 중 며칠을 일하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
4.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들에게는 자기만의 방과 500파운드의 수입이 필요하다.”라고 적었다고 한다. 페미니즘과 별개로, 이 말이 내게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살았던 당시의 여성들이 처했던 입장과 현재의 나는 같은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면 된다. 원하는 작품을 마음껏 만들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다행히 내게는 내 방이 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 내 작품을 몇 개씩 구매하고 전시에 꼭 연락을 달라는 컬렉터가 있다. 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약속대로 대가를 지급하는 사업체도 있다. 내 가르침을 기다리는 제자들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홍대 앞 반지하 작업실과 비교 불가한 메리트가 있다.
그렇다. 예술가는 굶지 않아도 된다. 아니, 잘 먹고 잘 살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