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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다고 Mar 08. 2024

감정의 속도

감정은 실시간일까

1. 장송의 프리렌


최근 들어 재미있게 감상하고 있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이름 하여 "장송(送)의 프리렌(Frieren)"이다. 죽은 이를 장사 지내 보내는 의미인 장송과, 독일어로 얼어붙다, 또는 차갑다는 뜻의 프리렌이 만난 제목이다. 참 거창한 제목이라 생각했다. 


 설정은 참신하다. 대개 이런 판타지물의 이야기 전개 방식은, 세계관 최강자인 빌런을 해치우고 평화를 가져오는 과정에서 겪는 모험이 주로 표현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미 주인공인 프리렌과 그 동료들이 마왕을 해치운 이후의 후일담이다. 동화의 결말을 교묘하게 비틀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던 픽사 애니메이션 <슈렉>과 비슷한 발상이지만, 아예 후일담 자체를 이야기로 삼은 것은 개인적으로 처음 보는 것이다. 


넷플릭스에서 방영 중인 애니메이션 <장송의 프리렌>


 이야기의 주인공 프리렌은 엘프다. 대다수의 판타지물에서 표현되듯, 백 년을 채 살지 못하는 인간과는 수명에서 압도적인 차이를 보이는 종족이다. 그녀는 설정상 천 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것으로 묘사되지만 외모는 십 대 소녀에 불과하다. 그런 프리렌은 드워프 전사 아이젠, 인간 전사 힘멜, 인간 성직자 하이터와 함께 팀을 구성해서 10년간의 모험 끝에 세계의 적 마왕을 해치운 뒤 자기만의 취미인 마법 연구의 길을 떠난다. 인간인 힘멜과 하이터에게는 종종 얼굴을 비치겠다는 말을 뒤로한 채. 그녀에게 있어 10년이란 그저 짧은 소풍 같은 기간이었을 뿐이다. 그 사실을 동료들도 잘 알고 있지만 내일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자연스레 인사하며 그녀를 보내 준다.


마왕을 해치운 뒤 환영식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프리렌과 동료들


 그리고 오십 년 뒤, 그녀는 맡겨둔 물건을 받으러 동료들을 찾아온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꽃미남 힘멜은 이미 대머리 꼬부랑 노인이 되어 있었고, 술고래 성직자 하이터는 제법 어른의 풍모를 갖춘 노년의 주교가 되어 있었다. 수명이 긴 드워프 아이젠만이 모험 당시의 모습이었으나, 나름대로 나이를 먹어 예전 같은 모험은 할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오십 년 주기로 돌아오는 혜성을 보러 가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자며, 프리렌은 동료들과 별을 보기 좋은 곳을 향해 짧은 여행을 떠난다. 힘멜은 별을 보며 행복을 느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명을 다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다. 

 

힘멜의 죽음을 슬퍼하는 프리렌


 뒤이어 밝혀지는 사실은 힘멜이 프리렌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 년이나 살아온 프리렌은 힘멜의 사랑을 감정의 속도가 느려 그것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고, 그런 그녀를 위해 힘멜은 여러 가지로 노력을 기울인다. 세계 곳곳에 자신과 동료들의 동상들 및 기념물을 만들어 두고, 추억들을 떠올릴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리고 힘멜이 세상을 떠난 뒤 수십 년 간, 프리렌은 여행을 하며 힘멜과의 기억들을 하나씩 마주치며 그의 사랑과 자기의 마음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참 마음이 먹먹해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프리렌의 여행지 곳곳에 세워진 동료들의 동상


 아직 이야기는 진행 중이고, 이 외에 많은 등장인물들이 매력적으로 그려지고 있기에 더 이상의 내용은 기재하지 않겠다. 다만 이 작품을 우연히 손을 대고 보면서, 감정의 속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성장의 속도와 관계가 있는 걸까. 서로의 정신적 성장이 다를 때, 감정의 교류는 어떻게 진행될까. 다시 만나기에는 너무 멀리 지난 시간대에서도 뭔가를 느낀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지나간 감정은 그대로 끝났다고 봐야 할까.


2. 성장과 감정의 상관관계


 인간은 십 수년의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보내고 성인이 된다. 기나긴 유년의 시간 동안 많은 보살핌을 필요로 하고, 성인이 된 뒤로는 더욱 긴 시간 동안 자신을 보살피며 살아야 한다. 갓난아기가 일어나 걷기까지 짧게는 수개월에서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지만, 사슴이나 말은 태어나자마자 걷는다. 인간이 겨우 임신과 출산을 하게 될 때까지 십여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강아지나 고양이는 수년 내에 여러 마리의 새끼를 낳기도 한다. 동물에게도 감정이 있다면,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긴 수명을 지닌 인간과 교류할 때 어떤 기분일까 궁금하다. 


 비슷한 수명의 사람끼리도 감정의 속도에 차이가 있다. 소위 금사빠(금세 사랑에 빠지는 사람)라는 사람들은 "첫눈에 반했다."는 표현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아주 천천히 호감을 가지고 살다가 감정을 나눌 기회를 놓쳐버리고 후회하며 지내기도 한다. 감정의 속도는 어떤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시간선에서 저마다 다르게 흘러가는 감정들을 어떻게 맞추며 살아갈 수 있을까.


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이것은 성격과 인간성의 차이 이상으로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나의 모습을, 정신을, 그리고 인격을 사랑해 주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사실은 얼마나 소중한 경험인가. 생물학적 본능을 충족하기 위해, 또는 경제적 만족이나 불안정한 상황의 해소를 위해 사람을 만나고 감정을 교류하는 것은 각자의 선택이다. 그러나 지금, 나, 이 두 가지 기준에 맞춰 일회성으로 감정을 소모하는 것은 조금 아깝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3. 감정은 실시간일까


 이 이야기의 프리렌은 힘멜을 사랑했을까, 사랑할까 또는 사랑하게 될까. 이미 세상에 없는 존재를 사랑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사람은 어떤 감정의 경험을 했던 걸까. 우리의 감정은 실시간으로 흘러가는 게 맞긴 한 걸까. 결말이 나기 전까지 내내 궁금할 것 같다. 


 분명한 건, 감정을 다루는 이야기는 언제나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영원한 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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