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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다고 Feb 29. 2024

아름다워(작업일기를 위한 에세이)

세상은 이미 아름답다

1. 마주친 모든 것이 아름답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의 볼주머니.

아이가 넘어질세라 꼭 붙잡은 할머니의 주름진 손.

그네에서 진자운동을 즐기는 소녀.

뭐가 그리 웃긴 건지 친구와 내내 폭소하는 남자아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나란히 걷는 모녀의 뒷모습.

버스 정류장 앞에서 어묵을 고르는 아저씨.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동료에게 보여주며 웃는 공사장 인부.

어린아이처럼 주인의 품에 소중하게 안긴 채 멀뚱 거리는 푸들.

한강 공원의 편의점에서 아들에게 라면 끓이는 법을 알려주는 아버지.

벤치에 앉아 육포를 먹으며 책을 읽는 여학생.

이마의 땀을 훔치며 뜀과 걸음 그 어딘가에서 노력하는 덩치 큰 청년.

쓰레기를 한 데 정리하고 나서 잠시 담배 한 대를 피우는 미화원 아저씨.


아름다웠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리따운 재주꾼들 못지않았다.

모두가 저마다의 좌표를 그리며 이 순간을 살고 있다.

'보기에 참 좋았더라'는 창세기의 구절이 생각났다.

세상을 창조한 뒤의 신은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늘이 파랗고, 구름은 하얗다.

바람이 서늘하게 두 뺨을 어루만진다.

8분쯤 전에 인류와 지구의 고향에서 출발한 빛이 강물에 부딪쳐 열십자로 쪼개진다.

다이아몬드 한 통을 쏟은 듯한 빛의 조각들을 한껏 느끼며 기어를 올린다.

페달을 밟는 동안 허벅지가 잔잔한 고통으로 소리를 지른다.


한강공원에 들어가기 전, 밤고개마을 어귀에서 찍은 사진


2. 속도가 중요한가


누구는 빠르게 달려 곁을 스쳐가고, 느릿한 누구는 내가 스쳐간다.

한참 달리다 잠시 쉴 곳을 찾으면, 먼저 간 사람은 거기에 있고 나중에 오는 사람은 곧 도착했다.

의외로 속도의 차이가 만든 거리는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방향이 같으면 누구나 이 지점을 지나게 된다.


저마다 자기 형편에 따라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싸구려 철제 자전거, 중저가의 하이브리드 자전거, 카본 프레임 자전거. 어떤 이는 따릉이.

빠른 속도를 즐기는 사람도, 느긋한 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도 언젠가 멈출 때가 온다.

조금 더 멀리 왔어도 내가 있는 좌표는 그 한 지점뿐이다.

더 앞도, 뒤도 아닌 단 하나의 지점.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그 하나뿐이다.


그래야 정할 수 있다.

나아갈 것인지, 돌아갈 것인지.

몇 가지 이미지가 문득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한강공원 어딘가에서 63빌딩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


3. 어디에나 있는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 사용했던 상수동 반지하 작업실에서 창작을 위한 고뇌에 시달리고 있던 내가 떠올랐다.

아, 영감. 그놈의 영감. 눈앞에 어른거리면서 도저히 구체화할 수 없던 것. 그것은 어디에나 있었다. 내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며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작업을 하는 방식은 작가의 개체만큼이나 다양한 것일진대, 막연하게나마 알면서도 자신과 싸우던 나였다. 그래야만 작가인 척 젠체하며 콧대를 높이 세우던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천부인권처럼 주어진 두 다리의 동력만으로 이토록 많은 것을 느끼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둘러보는 능력은 인간만의 특권이다.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틀에 가둔 채 가상의 적과 스파링하던 것이다. 아무도 원치 않는 링에 올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에 휘두르고 있던 것이다.


문득, 세상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싶어졌다. 그것을 그리고 싶다. 깊은 애정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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