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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by 유시민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by 분당주민

긴 명절 연휴다.

회사에서 짬을 내서 읽고 수면 유도를 위해 침실에서 자기 전에 읽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시간을 두고 읽고 싶은 책을 고민했다. 연휴 시작 전 다행하게도 “책을 쓰는 과학자들” - 위대한 과학책의 역사 - 를 다 읽었다.

긴 명절 연휴, 온전하게 한권의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청춘의 독서”는 유시민 작가의 책 중 유일하게 읽지 않은 책이다.

2009년 초판이 나왔고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은 24. 12. 3일 비상계엄 선포 이후 우리 모두가 함께 겪었던 국가와 정치의 풍파를 소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 21세가 문명의 예언서 -의 꼭지를 보충해서 특별판으로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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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다루는 15개의 꼭지는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혁명의 매력, 불평등, 보수주의에 대해, 개인의 욕망, 권력투쟁, 슬픔에 관하여,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인가의 질문, 왜 우리는 부자가 되려는가에 대한 의문,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역사의 진보를 믿어야 하는가 등의 내용을 다룬다.


왜 15가지의 꼭지였을까? 15가지의 책의 공통된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동서양을 왔다 갔다 하고 도무지 모르겠다.저자 역시 후기에 어떤 책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저 오래전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면서 과거의 그를 다시 만나고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고 이것이 흥미로움이 되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고 한다.그래서 더 고민도 생각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런 책은 순서대로 읽는 것보다 제목을 보고 그저 끌리는 대로 뒤에서 앞으로 다시 중간으로 흥미롭게 보이는 아무 페이지를 읽어도 된다.


첫 순서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지만 나는 책장 어디에 있을 것 같은 제목은 뚜렸한데 기억이 전혀 없는 거의 마지막 챕터인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먼저 읽고 슬픔도 힘이 될까라는 저자의 느낌이 담긴 9번째 챕터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을 읽었고 다시 첫 챕터로 돌아와 죄와 벌을 읽는다.


유시민 작가에게서 나올 수 있는 평이한 주제라고 생각하는데 이 책이 조금 더 특별한 건, 그의 다른 책들에 비해 그의 생각과 감정이 제일 많이 표현되었다는 것 같다. 여기서 생각은 그의 추억과 기억인 것 같고 감정은 그 추억과 기억속에서 찾아낸 느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책 속에서 20대의 삶이 많이 노출된다.


다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는데 아마도 시대는 달랐지만 서울 어디인가 같이 있었을 것 같은 공간, 군사독재가 끝났지만 그 잔재가 남아있던 환셩 속에 함께 있었을 것 같은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유시민을 유명하게 만든 여러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유시민을 사람들은 다르게 기억하고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누구는 100분 토론 진행자로, 국회의원이 되고 정장을 입지 않고 첫 국회 대면을 한 순간,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등) 내 기억에 유시민이 처음 들어와 지금까지도 망령처럼 내 머리와 가슴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 그의 책을 아무 고민 없이 집어들게 한 20년의 삶의 궤적에는 그가 26살에 쓴 항고서 때문일 것이다.


1985년 봄, 유시민 작가의 스물여섯 나이, 그가 영등포 구치소 독방에서 만난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의 데뷔작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서문에서 19세기 러시아 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의 시 한 구절을 보고 첫 눈에 반해버린 그 문구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유시민 작가는 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고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한 ‘항소이유서‘ 마지막 단락에 인용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존엄을 빼앗긴 사람의 지극히 평범한 하루의 이야기지만, 슬픔과 노여움이 진하게 느껴지며 아마도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의 시 구절이 머리 속에 떠올랐을 것이다.


작가의 러시아 문호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진다. 책속에는 도스토옙스키, 푸시킨, 솔제니친의 글들이 담겨있다. 15개의 삶의 이정표에 3개의 지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며 그런 생각과 느낌이 든다. 아마도 제정 러시아 시절 폭압과 억압을 담아낸 그들의 삶이 대한민국에서 살아간 20대와 매우 흡사한 상황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판단해 본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대위의 딸"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진보적 견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작가는 푸시킨에게서는 인류가 오늘날까지도 온전히 실현하지 못한 휴머니즘과 민중에 대한 사랑을 문학으로 꽃피움을 배웠고 당대의 현실(재정 러시아)에 대해 그가 느꼈을 분노, 환희, 절망을 느낀 것 같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에서는 가난의 책임이 가난한 사람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권력에 대한 갈등을 담아낸다. 평범한 사람이 순종하고 법률을 어길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반면 비범한 사람들은 모든 종류의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권리와 법률을 위반할 수 있는 권리 있는지? 선한 목적은 악한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이 맞는지. 그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 인간의 양심에는 악을 저지하는 ‘장애물’이 있다. 우리가 양심으로 부르는 인간의 도덕적 직관은 수백만 년의 진화를 통해 형성된 사회적 본능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악한 수단을 사용한 데 따르는 정신적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

인류는 20세기의 전체주의 경험을 통해 나쁜 수단으로 결코 좋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았음을 이야기 한다.


이 러시아 문호들의 이야기에서 연결되는 것은 아마도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관한 것일 것 같다.

작가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을 청춘을 뒤흔든 혁명의 매력으로 표현했다.

공산당 선언은 단순한 정치적 선동문이 아니다. 역사적 유물론 또는 유물사관의 토대 위에서 공산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논증한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공산단 선언은 포악한 권력의 무자비한 압제와 넘어설 수 없는 절대 빈곤의 장벽에 절망한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준다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지금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몰락한 것은 이 이상은 훌륭할지 몰라도 그 이상을 추종한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은 졸작이었다.


이기적인 욕망 추구를 부정하고 자유로운 개성의 발현을 극도로 업악하는 사회는 오래 지속되기 어려우며 지속된다 하더라도 좋은 사회라고 말하기 어렵다. 다만, 19세기 유럽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 대중이 처했던 극단적 빈곤과 전적인 무권리 상태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노에 공감한다. 체제는 실패했어도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종식할 방법을 모색한 그의 집요한 노력에 공감하며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노동권과 사회권은 마르크스와 같은 이상주의작 혁명가들의 노고에 힘입은 바 크다는 가치는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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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공산주의를 선택한 곳은 지옥이고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는 천국이었는가? 그 시절에? 그렇지도 않았던 것 같다. 이념이 전쟁을 일으키고 세계를 긴장속에 몰아넣었던 20세기 중반, 어떤곳에도 속할 수 없는 개인의 욕망을 표현한 “최인훈, 광장”도 의미있게 다가왔다.

작가는 조국의 현실과 민족의 미래를 고민하는 지성인이라도 한 번은 읽어야 할 소설로 평가한다.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한 남한에서 빨갱이 새끼 한 마리쯤 귀신도 모르게 죽여버릴 수 있다는 말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데 저자가 소설을 읽었던 시절에도 여전히 유효한 시대여서 정서적 연대감을 느낀 것 같다. 저자가 느낀 대한민국은 국민이면서도 법률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한다는 절망감과 모멸감, 공포감에 공감했고 강요된 월북은 그가 혁명의 공화국으로 생각했던 북에서 또 다른 절망과 모멸감에 빠지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인간의 욕망을 억압하면서 사회적 사명감으로 사람을 강제하는 체제, 개인의 자발성과 신명을 말살해버리는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할 수 없다는 작가의 진단이다. 북한 역시 혁명이 일어난 공화국이 아니라 혁명을 팔아먹는자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인간을 억압하는 독재국가였다. 혁명의 흉내만 내는.


다시 19세기로 돌아오면 기념비적인 2개의 작품을 소개한다. 저자는 15개의 책 중에서도 찰스 다윈스의 "종의 기원"과 같은 해에 출판된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추천하는 것 같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인가의 주제로 찰스 다윈스 “종의 기원"을 이야기하며 이 이론이 가진 진화론은 정치적 오남용의 위험을 내포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진화의 법칙을 승인한다면 인간도 사육동물처럼 개량할 수 있는가? 바람직한 변이와 바람직하지 않은 변이에 관한 질문. 바람직하지 않은 변이를 가진 사람을 도태시키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이 질문에 대한 긍정적 대답이 나왔으니 다름 아닌 ‘우생학‘이다. 종의 기원이 나온 지 10년 되던 해인 1869년 영국 과학자 프랜시스 골턴 “유전적 천재” 책 출간한 것으로 부자와 권력자들이 우수한 유전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인종차별, 장애에 대한 편견. 불임 시술과 독일 나치 정권이 우생학에 의거 순수 독일 혈통 보존 사업. 유대인 학살 정당화한 것이다. 이에 다윈은 1871년 “인간의 유래”에서 아타주의라는 인간의 도덕적 재능에 대한 수수께끼 해명하려고 했다. 즉 좋은 품성을 갖춘 사람이 늘어나고 도덕성의 기준이 진보할수록 부족 전체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다윈은 인간을 순전히 이기적 본능에 휘둘리는 존재가 아니라 진화의 과정에서 이타주의와 자기희생의 정신을 발전시킨 고귀한 도덕적 재능의 소유자로 보았다.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버리지 못하지만, 동시에 이타 행동을 우러러보는 직관적 도덕률을 지닌 동물이나, 진화론 자체가 워낙 유명했기에 그의 이런 유의미한 인간에 대한 존재는 빛을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같은 해 출간된, 특별판을 내며 추가한, 21세기 문명의 예언서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에 대한 내용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에 대한 설명한 단순하지만 다시 축적된 삶의 경험이 제공하는 성찰의 능력이 생긴 지금 작가는 이 책을 21세기 문명의 예언서로 추천한다.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최선의 방법, 자유는 우리 사람에 의미를 부여하는 최고의 가치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공리(公理)에 따르면, 인간은 쾌락과 고통 또는 효용과 비효용의 두 주인을 섬긴다. 이 두 주인 중 누구를 섬길지는 개인이 각자 판단해야 하는 것이지 남이 대신하거나 사회가 결정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문명이 발전해도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지대, 즉 토지 가치에 두고 그 해결책을 지주의 불로소득을 조세로 징수하고 그 대신 다른 모든 세금을 철폐하는 논리를 제공한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은 토지 투기를 비판하는 사회 분위기 조성했고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은 사람이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근거로 진보의 경제적 과실을 독점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진보와 빈곤이 동시에 존재하는 부조리를 해소하고자 했다. 마르크스와 달리 사유재산제도의 폐지,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주장하지 않았고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폐기하자고 하지도 않았다. 이어, 불평등은 불가피한 자연법칙인가를 이야기한 토마스 멜서서 “인구론”은 보수에 관한 연구로 동정심 없는 부자와 권력자가 마음속으로는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도덕적 비난이 두려워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견해를 완전한 형식으로 그것도 과학과 자연법친의 옷을 입혀 논증하며 (물론 그는 틀렸다)사실과 일치하며 논리적으로 완벽한 주장한 책도 의미가 있었고 보수주의자들이 이익이 아니라 "가치"를 탐해야 한다는 진정한 보수주의자인 맹자를 만나는 것도 새로운 지식을 축적할 기회였다.


지식인은 지적 암흑 상택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 저자가 6번 읽었다는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역사의 진보에 대한 그의 삶의 전환점(사회와 역사의 진보, 과거와 현재의 관계)을 보여준다.


책이 의미가 있었던 것은 이 책에서 저자가 책을 다시 읽으며 얻은, 삶과 인간과 세상과 역사에 대한, 그의 감정과 생각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20대의 저자의 감정은 슬픔과 분노였을 것 같고 생각은 그럼에도 역사는 진보하고 혁명의 진정한 가치를 빛을 볼 것이고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가 올 것이라는, 수직적 '병영문화'가 아닌 수평적 '광장문화', 용기였을 것 같다.


독서는 책과 대화하는 것이며, 책을 읽는 사람의 소망과 수준에 맞게 말을 걸어준다고 한다. 20대 그 시절 읽었을 책을 삶의 경험이 축적되고 성찰이 무엇인지 알았던 지금 다시 읽는 것에 대한, 그래서 책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도, 다시 나는 그 예전 어린 시절 읽었던 책들의 희미한 기억을 앞으로 살면서 한번은 꼭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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