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에서 노은님 1주기 추모행사에 지인의 초대로 다녀왔다.
토요일 오후라 막히는 길을 가다 서다 하면서 피곤함을 느꼈고
나들이 차량으로 아수라장이었던 상암일대를 지나면서 짜증이 극에 달했다.
거기에 집사람과 일정을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어 출발부터 약간의 짜증을 안고 간 것도
가는 여정을 힘들게 했다.
나는 미술을 잘 모른다.
일반 사람들이 알 만한 작가를 아는 정도 수준이다.
아마도 초대가 없었다면 노은님의 서사를 모르는 상황이었다면 토요일 막히는 길을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노은님은 파독 간호사였다. 화가가 되기 위해 독일로 간 것이 아니었다.
파독 간호사였던 노은님은 독일에서 쉬는 날 밖에 나가면 말이 통하지 않아
오히려 스트레스가 더했고 온종일 집 안에 박혀 그림만 그렸다고 한다.
그러나 우연히 아파서 결근한 어느 날, 문병차 들른 간호부장이 그녀의 그림을 발견하고 눈이 커져
“당장 전시회를 열자” 한 계기가 그녀를 기적의 역사로 이끌었다.
함부르크 국립미술대학교를 졸업하고 함부르크 국립예술조형예술대학에서 교수까지 지냈다.
표현주의 일색이던 당시 독일 화단에 고향의 풍경과 새·물고기를 동심 가득 담아 표현한 노은님 화풍은 단숨에 이목을 끌었고 “동양의 명상과 유럽의 표현주의를 잇는 가교”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조선일보 발췌)
작가는 전주에서 9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고
스물한 살 때 모친을 잃고 아버지마저 사업에 실패하자 스물 넷 되던
1970년 파독 간호사·간호조무사 모집 광고를 보고 독일행을 택했다.
독일을 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 작가를 영원히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 환경에서 노은님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었을까? 기회를 얻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삶은 우연한 기회에 바뀌기도 한다.
이런 우연한 기회가 노은님의 재능을 세상으로 이끌어준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다.
노은님 1주기 추모행사 황인성 큐레이터의 글에서 작품을 읽을 수 있다.
순수함, 단순함, 천진함이 그림에 모두 담아있는 것 같다.
황인성 큐레이터는 작품의 단순함과 천진난만함을 이야기하며 작품에 생명의 기운을 담아냈고
이것은 작가의 순수함을 근간으로 가능했다고 한다.
복잡함이나 기술을 떠나 단순함이 남아있을 때 예술은 더욱 살아있음을 이야기한다는
글에서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욕심이라면 작가님의 작품으로 작가님 고향에 작품을 전시하고
미디어 아트까지 함께 기획해 본다면 작가님의 작품을 의미있게 세상과 공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