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서 20여년을 지내다보면 매년 이 시기는 (10월 말에서 11월 초) 정말 어수선하다.
그룹에서 각 계열사 대표를 발표하고 임원인사 그리고 이어지는 조직개편.
9월이 지나고 10월이 되면 온갖 소문이 난무하기 시작한다. 집에 가실 분들, 누가 온다더라 뭐 이런식.
그 소문은 대부분 본인이 유리한 쪽으로 믿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 소문이 맞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허다한데, 인사는 발표나기 전까지 잘 모른다.
발표 전날까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내년도 삶을 계획하다 다음날 방 빼는 임원들 수없이 봤다.
이야기 하기 좋아하고 오지랖의 도가 지나치고 조직의 삶을 정치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 시기가 되면 가장 신난 듯 입방정을 떤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본인들의 앞날도 모르는 한심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어릴적에는 몰랐다.
대표가 바뀌고 조직이 다시 헤쳐모여 하는것이 뭐가 내 삶에서 중요한지.
그냥 조직 발령이 나면 그 발령에 맞춰 자리 배치가 나오고 그 자리 그대로면 주변 정리정도 하고
자리가 바뀌면 짐을 싸고 자리를 이동하고 주변을 정리하고 노트북 세팅하고
헤쳐보인 팀 구성원들이 모여 회의를 시작하면 또 다른 한해가 시작되고는 했다.
어릴 적에는 코드를 맞출 일이 많이 없다.
빠릿 빠릿 복사를 잘해오고 술을 잘 마시고 당구를 칠 줄 알고 밝고 인사를 잘하고
그러면 되는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에 쓰는 제안서나 보고서는 그저 윗사람들의 참고 자료 정도였을 것이다.
뭘하는지 몰랐지만 퇴근은 매일 늦었고
윗사람들은 진짜 집에 잘 안가고 심지어 여름휴가도 잘 가지 않았다.
아주 옛날 내가 첫 입사한 H그룹은 과장 이하는 그냥 '야~'로 불리던 시기였다.
나이가 지긋한 분들은 여직원에게 '~양' '미스 ~'로 부르던 시절이니 나도 참 나이가 많다.
그렇게 처음 공채로 입사한 H그룹에서 첫 겨울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임원발표가 나던 날 저녁 늦게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는데 옆 사업부 임원이 짐을 챙기러 왔다.
영화에서 같이 박스를 들고 나가는 줄 알았는데
아주 조촐하게 가방과 쇼핑백을 들고 가셨고 그 이후로 그 분을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업무 인수인계도 없나?
그렇게 점심시간이 지나고 발표가 나고 그 분은 저녁에 짐을 챙겨 나가셨다.
이후 매년 짐을 싸서 집에 가는 임원들을 보는게 4분기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크게 실망하지도 큰 희망에 기대감도 없었다. 그 나이 때는 그랬다.
L그룹으로 이직한 이후에도 임원인사가 큰 영향은 없었다.
다행이도 내가 L전자에 있는 동안 임원이 바뀌지 않았고 팀장은 거지같은 인간으로 한번 바뀌고 나서
더 이상의 변화가 없었다.
팀 조직은 그 이름 그대로 몇 년을 지루하게 유지되었다.
그리고 계열사인 L애드로 옮긴 후 변화를 즉시하게 되었다. 영향이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직 후 첫해 2개 팀 중 나는 기획팀 소속이었는데 옆 비즈팀이 분해되었다.
어느 날 옆 팀이 공중분해되어 팀장은 면직되어 다른 사업부의 평직원으로 갔고
한명은 관리조직으로 또 한명은 퇴사하고 나머지 한명은 경쟁사로 이직했다.
처음으로 팀이 분해되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팀이 없어지는 상실감을 당사자인 내가 다 이해한다고 할 수 없겠지만
그들의 표정에서 어느 정도는 그 상실감을 느낄 수 있었다.
중간관리자가 되고 나서
팀은 미디어사업부로 다시 프로모션사업부로 또 다른 프로모션사업부로 이사를 했다.
격해로 짐을 싸고 풀고 14층에서 12층으로 다시 14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업무인수인계, 업무보고 등 매년 11월은 50장에 가까운 서류와 씨름을 했다.
같은 서류를 새로운 임원에게 보고하기 위해 새로운 임원에 코드에 맞게 수정했다.
같은 내용을 다른 디자인으로 그리고 임원에 성향에 맞게 3개년 중장기 계획도 수립해야 했다.
이 시기에 역량이 많이 늘었다. 업무 뿐만 아니라 나도 코드라는걸 알게 된 시기이다.
그리고 조직의 리더가 되었다.
다행인지 내가 있는 동안은 큰 변화는 없었다.
변화가 없어 맞추던 코드만 신경쓰면 되는 시기였다.
중간관리자 1명을 다른 팀으로 보냈고 새로운 중간관리자를 채용한거 외에는
큰 변화가 없었던 아주 평화로운 시대였다.
나는 회사 대표가 집에 가는 해 11월에 이직했다. 이직사유는 애매했다.
지금은 그 이직은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
몇 년간 별 다른 변화가 없어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시기였다.
다행이도 조직에서 큰 무리없이 잘 지내고 있었고 우연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어떤 계기인지 대표가 잘 봐서 결재 받는 일도 수월했고 대표의 이야기도 큰 반감없이 잘 청취했다.
비서와도 친해졌고 대표님 보고 시간도 잘 배정해 주었다.
보고서의 장수도 줄었고 보고서 작성 시간도 줄어서 제 시간에 퇴근하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이제 몇 년 평화로운 시대가 열릴 것 같은 기대였는데, 대표가 면직이 되었다.
새로운 대표의 인사발령을 봤다. 누군지 모르는.
그리고 몇 일을 심란하게 보내고 있다. 나이를 먹고 나니 뭔가 변화하는게 싫다.
불확실성을 최소화 해야 어느정도 사무실의 삶이 평화로운데 이제는 불확실성의 천국이 되어 버렸다.
대표가 면직된건 그간의 사업이 많이 정리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진행되고 있는 사업은 축소가 되고 조직은 오리무중인 상태에서 어느날 갑자가 발표가 날 것이다.
회사의 인사는 모든 임직원을 100% 만족시킬 수 없다.
특히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 큰 변화를 마주해야 하는 상황이면 많은 사람들은
조직결과에 실망할 것이 뻔하다.
그래서 아무리 거지 같아도 그냥 있는 사람이 있는게 제일 낫다는 생각이다.
변화가 힘들고 두려운 나같은 나이와 직급은.
오늘 아침 비가 조금씩 내리더니 사무실에 도착한 이후 비바람이 거세진다.
오늘 날씨는 딱 지금 회사의 분위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