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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박두성, 두 사람의 사랑이 이어준 아침

오래된 노트에서 찾아온 감동.

by 김성자예쁜


책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오래된 노트 한 권이 툭 떨어졌다. 예전에 적어 두었던 일기였다. 페이지를 펼치자, 그때의 내가 감동해 적어두었던 세종대왕의 이야기가 따뜻하게 되살아났다. 오늘 아침, 그 글을 다시 읽으며 마음 깊은 곳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나는 세종대왕을 늘 훌륭한 임금이라고 여겨 왔지만, 그의 진심은 생각보다 훨씬 깊다. 조선 시대라는 신분 사회 속에서도 그는 늘 약자의 편에 서 있었다. 노비에게 출산 전 30일부터 일을 쉬게 하고, 출산 후에는 100일의 산후 휴가를 주었던 임금. 그 시대를 생각하면 거의 기적 같은 일이다.

백성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정책이라도 추진하던 세종, 그 곁에서 신하들은 밤낮없이 일할 수밖에 없었다.


기력이 약해져 사직서를 내던 우의정 권진, 눈과 귀가 어두워 더는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던 명재상의 정치 베테랑인 황희. 하지만 세종은 그들의 사표를 허락하지 않았다.

“슬픔은 일로 잊을 수 있다”며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에도 고기를 먹게 하고 관직을 지키게 했던 이유 역시 아버지를 잃은 이의 마음까지 살피는 깊은 사랑 때문이었다. 덕분에 황희는 87세까지 현역으로 일했고, 은퇴 후 3년 뒤 세상을 떠났다. 그의 긴 생을 버티게 했던 힘 중 하나가 바로 세종의 배려였을 것이다.


세종은 평생 책을 놓지 않았다. 열이 펄펄 끓어도 누워 읽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독서와 사색의 끝에서, 결국 시력을 잃어가면서까지 만들어낸 것이 훈민정음이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아 백성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하려는 마음.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 백성이 이를 쉬이 익혀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한다.’

그 구절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지금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세종은 예(禮 예의범절)와 악(樂 음악)을 통해 백성의 도덕을 바로 세우고자 했고, 충신과 효자, 열녀의 이야기를 모아 삼강행실도를 편찬하며 바른 길을 보여주었다.


고기를 좋아하던 세종을 위해 태종이 죽는 마지막 순간 “세종에게 고기반찬을 꼭 먹이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긴 이야기 역시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효심 깊은 세종은 처음엔 고기를 끊었지만 결국 몸이 쇠약해져 다시 먹기 시작했고, 그 또한 인간적인 모습이라 오히려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이쯤 되면 세종이 왜 ‘성군(聖君)’이라 불리는지 새삼 알 것 같다.

몸은 육중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부드러웠고, 백성을 향한 사랑은 말이 아닌 실천이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이어졌다.

한글을 만든 이는 세종이지만, 시각장애인을 위한 한글 점자, 즉 ‘훈맹정음(訓盲正音)’을 만든 사람은 박두성 선생이다.

'훈맹정음은 1926년 서울 맹학교 교사인 송암 박두성 선생이 창안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장애인 중에서도 맹인이 가장 불쌍하다”라고 말하며, 시력을 잃어가면서까지 점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곤 했단다.


“점자 책은 쌓아두지 말고 꽂아두라.”

무게에 눌리면 점자가 뭉개져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박두성 선생 역시 말이 아닌 사랑으로 시각장애인들의 세상을 열어 준 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시각장애인의 세종대왕’이라 부른다는 말이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 혼신을 다했던 것처럼, 박두성 선생도 장애인의 삶을 밝히기 위해 자신의 빛을 잃어갔다.

두 사람의 마음은 시대를 넘어 서로 닿아 있는 듯하다.


오늘 아침, 오래된 일기를 통해 다시 만난 세종과 박두성.

두 사람의 사랑이 이어져 내 마음까지 따뜻하게 데워진다.

세상의 이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고요한 울림, 그 울림이 오늘 하루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리라 믿는다.


역시 책은, 그리고 마음을 다한 사람의 이야기는 언제나 나를 따뜻하게 하는 요술쟁이다.

옛날에 이 일기를 써두지 않았다면 묻혀버렸을 이야기가 다시 내 마음을 흔들어 준다. 그래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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