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되었을 수도 있었던 또 하나의 삶
내 이름은 두 개다. 집에서는 김희정, 세상에서는 김성자. 어릴 적부터 이 두 이름을 오가며 살아왔다. 지금도 언니들은 여전히 “희정아” 하고 부르지만, 모든 서류와 명부에는 ‘성자’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결국 공식적인 내 이름은 성자가 되었다.
깊고 깊은 산골, 김씨 집성촌에서 태어난 나는, 면사무소까지 몇십 리를 걸어가야 하던 시절의 아이였다. 동네 어른 한 분이 이 집 저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을 외워 한꺼번에 출생신고를 하러 갔는데, 종이 한 장 없이 머릿속에만 담아간 이름과 태어난 날이 면사무소 앞에 이르자 뒤죽박죽 섞였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나는 김희정에서 김성자가 되었고 생년 월 일도 2년이나 늦게 실렸다.
그땐 흔한 일이었다고 하지만, 어릴 적의 나는 서운했다. 내 존재를 단 한 글자도 제대로 살려주지 못한 것 같아서였다. 아버지는 농사만으론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 외지에서 장사를 하셨기에 집안 어른의 손을 빌린 것이다. 어머니는 입학 통지서가 나오지 않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학교만큼은 제 나이에 보내야 한다고 애를 쓴 덕분에, 같은 나이 친구들과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늘 ‘1번’이었다. 누구보다 늦게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었기에 어리다는 이유로 먼저 출석을 불렀던 것이다.
가끔 상상해 본다. 내가 김희정으로 살았다면, 또 생일이 정확했다면 지금의 삶도 같았을까. 말투, 표정, 웃는 방식까지 달라지진 않았을까. 어쩌면 그 이름은 내가 될 수도 있었던 또 다른 삶의 갈래였을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다시 태어난다면 갖고 싶은 이름을 쓰라 했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김희정’을 적었다. 선생님은 하루 종일 “희정아, 이름 참 예쁘다.” 하며 나를 불러주었다. 그날 처음 느꼈다. 그토록 그리웠던 이름이 내 귀에는 어딘가 어색하다는 걸 알았다. 학교에서는 이미 ‘성자’라는 이름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었다. 그때부터 다짐했다. 열심히 살아서 이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자고.
돌이켜보면 ‘성자(成子)’라는 이름은 내 삶을 단단히 붙잡아주었다. 이루다(成)라는 글자처럼 성실히 이루며 살았고, 아이들을 품는 자(子)처럼 많은 아이의 온기를 잃지 않으려 애썼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기도 하다는 걸 배웠다. 이름은 누군가 지어주는 것이지만, 그 이름에 어떤 의미를 새길지는 결국 자신이 정하는 일이다.
요즘 나는 자주 이런 질문을 떠올린다. “이름이 바뀌면 나는 달라지는가?” 정체성이라는 것은 이름이 만들어주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이름에 이야기를 새겨 넣으며 만들어가는 것일까. 세상은 나를 성자라 부르고, 가족은 나를 희정이라 부르는 그 사이에서 나는 어느 쪽도 완전히 부정하지 못하고, 어느 쪽에도 완전히 머물지 않는다.
철학자 존 로크는 인간의 ‘자아’를 기억의 연속성에서 찾았다. 이름이 아니라 기억이 나를 나답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두 개의 이름 속에 담긴 수많은 기억의 총합일지도 모른다. 김희정의 기억, 김성자의 기억, 그리고 그 둘을 오가며 살아온 시간까지 모두가 나인 것이다.
사람들은 자주 이름을 바꾼다. 더 좋은 운세를 위해, 더 예쁜 소리를 위해, 새로운 삶을 위해.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이름을 바꾼다고 삶이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안다. 이름은 단지 껍데기일 뿐이고, 그 이름에 어떤 의미를 새겨 넣느냐가 삶을 바꾼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아 직장의 이름표를 내려놓는다. 아이들의 엄마, 남편의 아내라는 이름 뒤에 남는 나는 누구일까. 그 질문이 요즘 내 마음을 붙든다. 직업과 역할을 내려놓으면 남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하지만 두렵지 않다. 이름은 바뀔 수 있어도, 이름 안에 담아 온 나의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으니까. 나는 이제 ‘진짜 나’를 찾아가려 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유하며, 나라는 존재의 본모습을 만나고 싶다. 진짜 나는 외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존재하는 나를 만나기 위해, 찾기 위해 오늘도 한 걸음씩 내딛고 있다.
생의 마지막 날, 거울 앞에 선 나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성자야, 너 참 잘 살아냈구나.” 그렇다면 김희정도, 김성자도 모두 헛되지 않을 것이다. 이름이 나를 만든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이름들 속에 나를 빚어 넣어온 것이었음을 절감한다.
나는 두 이름 사이를 오가며 지금껏 살아왔고, 두 이름 모두가 나였다는 것에 고맙다. 앞으로의 날들도 그 이름을 품은 채 살아갈 것이다. 두 이름으로 인해 두 몫처럼 성실히 바쁘게 살아감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