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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것

미국일기_할머니 되는 나날

by 올리

여기 미국, 딸네집에 와서 지내는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일기를 써서 기록을 남기려고 했었다.

98일이나 머무는데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으면 남는 것이 없을 테니까.


사진?

사진 찍기엔 대체로 게으른 편이다. 게다가 컴퓨터에 저장해 놓은 데이터를 홀랑 날려버리는 일을 10년 전에, 또 지난해에도 겪고 보니 사진 그거 뭐.. 그런 생각이다. 인생의 중요한 사진이 다 없어졌다. 그런데 왠지 어딘가에는 있을 것 같은 느낌. 사진을 열심히 찍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신 일기 쓰기, 블로그 같은 곳에 해 두면 그것은 누가 가져가지 않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게다가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올릴 수 있는 '자격'을 얻고 보니, 약간의 '해야 할 일'을 갖고 있는 것 같은 부담감도 있어서 미국 딸네 집에서 지내는 나날의 소감을 종종 올리곤 했다.


그런데 그런 글쓰기를 이번 한 달 내내 거의 하지 못했다.

이유인즉슨 마음이 심하게 상해서 글을 쓰는 상황을 피했다고나 할까.

지인들의 이메일도 확인하지 않았다. 답장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내 상황을 들여다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가 힘들었다. 아니... 아팠다, 마음이.


3년 전, 딸 결혼시킨다고 여기 와서 몇 달 지내는 동안에도 마음고생을 많이 했었다.

코로나의 상황이었고, 딸의 결혼을 나 혼자 지켜보면서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이곳 미국 딸네집 상황이 나로 하여금 '고급 감옥에 있는 듯한' 답답한 상황을 만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 와서 3개월씩이나 지낼 계획을 세울 때는 그때 생각이 나서 걱정 되고 주저하는 마음도 생겼었다. 그래도 딸과 손녀를 돌봐야 하는 의무가 있으니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다르겠지... 하는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역시나... 힘든 나날이다.


3년 전 미국 왔을 때 일이다. 딸이 '엄마, 이제 은퇴해서 직장도 가지 않게 되었으니 이번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여기서 보내.' 하는 말에 결혼식은 10월인데 귀국 일자는 이듬 해 1월 초로 잡았다. 그렇게 하고 딸네 집에서 지내는 동안 하나 둘 불편함이 생기더니, 크리스마스는커녕 11월부터 딸과의 갈등으로 서울 집 생각이 간절해졌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인 미용실에 갔다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서울서 와서 딸네 집에 있는데 마음대로 다니지도 못하고 답답하고 불편해서 괴롭다고 했더니, 산후조리 도와주러 온 친정엄마들은 더 하다며 나이 지긋한 원장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산후조리 하는 딸을 도와주러 온 친정엄마들은 미역국 끓이는 간장 하나 마음대로 사기 어려운 상황에 대한 답답함과 육아 전쟁으로, 딸과 갈등이 생겨나고 사위와의 관계까지 틀어지곤 한다는 것. 시장을 보려 해도 자동차를 운전하는 딸이나 사위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딸은 출산한 몸이지, 사위한테 부탁하려니 일하는 사위가 내 맘대도 움직여주지 않는 상황이 되곤 해서, 안 그래도 육체적 고달픔이 큰데, 딸과 사위에 대한 불만까지 잔뜩 생겨서 미장원에 오시자마자 눈물 쏟으며 하소연하시는 분들이 허다하다는 것.

'다시는 안 온다' 그러시며 한국으로 돌아가신단다. 결혼한 자식 집에서 지낸다는 것은 누구랄 것도 없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당시 나의 딸은 아기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었고, 나는 비록 덜덜 떨면서도 살살 운전을 하며 다니기도 했던 터라 '내게는 그런 일은 없겠네' 싶었다. 그래서당시엔 나의 형편보다 더 힘든 '친정엄마들'이 있다는 소리에 약간의 상대적 위로를 받기도 했었는데, 이번에 와 보니...


맞다. 나도 그런 심정이다.

상황히 딱히 비슷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장보기는 아기 낳기 전에 미리미리 해 두었고, 안사돈께서도 드나드시며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셔서 어려움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사위는 친절했다. 그리고 남달랐다. 그래, 남달랐지...


처음 갈등은 사위와의 의사소통에 오해가 생기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오해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딸의 입장이라니..

미국에서 나고 자란 사위는, 딸과 연애하면서 한국말이 늘었다고 자랑하는 교포 미국인이다. 동생들이나 얼굴로는 한국인이 틀림없을 그의 친구들을 만나면 영락없이 영어로만 대화하는 형편이니 내 말에 오해할 가능성은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의식하지도 못한 말로 사위가 맘 상했다는 것을 내게 알려주고 그 중재에 나선 딸, 그 딸이 내 마음을 오히려 아프게 했다.


그랬구나, 알겠어. 내가 네 남편한테 잘 이야기해 볼게... 로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딸의 반응은 나를 한결 더 서늘하게 만들었다. 엄마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며 나의 말투, 표정, 태도 등에 대한 못마땅함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을 알게 해 주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딸의 지적들이 용납이 잘 되지 않았다. 또한 설령 엄마가 주책이라서, 미국식 교양 수준이 떨어져서 그렇다 하더라도, 엄마 편 좀 들어주면 안 되나..

그런 생각이었다. 서운했다. 그리고 많이 슬펐다.


나는..

서울에서는.. 미국 쪽 바라보며 딸을 그리워하며 살다가 마침내 여기 딸네집에 왔는데 그런 지적이라니. 이번에는 서울 쪽을 생각하며 다시 한없이 외로워졌다.


딸 하나, 열심히 키웠다.

내가 하고팠던, 그러나 할 수 없었던 그런 일이 딸에게는 생기지 않도록 노심초사 온갖 정성으로 키워냈다.

그리고 멋진 청년을 만났을 때 정말 기뻐하고 축복했다.

운동을 좋아하는 건강한 청년이요, 동생이 둘이나 있으니 혼자 자란 딸에게 형제자매가 생겨서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또 음악을 업으로 하니 딸과는 일에서나 가정에서나 평생의 동반자로서 서로 도우며 얼마나 잘 살겠는가. 게다가 믿음 부족한 나에 비하여 신앙심 좋은 부모님까지 둔 청년이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신난다, 즐겁다.. 하면서 딸의 혼인을 기뻐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돌아보니 딸은 미국으로 가버렸고 나는 서울에 덩그마니 혼자 남아있었다.


딸은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학부 때도 연수다 여행이다, 1년 간의 교환학생 경험까지 집을 자주 비웠으니, 딸은 20대에 들어서자마자 내게서 독립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혼을 하네 마네.. 마음속으로 수 백번 생각을 하면서도 실행을 못하고 당장 내 눈앞에 있지 않은 남편의 실제적 존재 없이 지낸 지도 20년이 한참 지났다. 이미 오래전부터 혼자였는데도 나는 내가 혼자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지냈다. 나의 정년퇴직과 함께 딸의 결혼, 그 시기를 맞고서야 셋인 줄 알고 살았다. 그런데 사실은 둘이었고, 그 둘 중 하나인 딸이 결혼하여 미국에 살게 되면서 나는 정말 혼자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비로서 얻게 된 것.


그렇지만 나는 내 삶에 너무나 씩씩했다.

37년 직장생활을 끝낸 후련함은 대학을 졸업했던 그때 마음처럼, 앞으로 펼쳐질 자유와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떠서 벅찬 즐거움으로 지낼 수 있었다. 가끔은 딸의 부재가 일으킨 허전함이 슬픔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그래선지 명절이나 이름 붙은 날은 정말 지겨운 날들이 확실이 되어 버렸다.

혼자임을 절감하는 때이기에 때문이다. '명절에 가족들을 만나는 게 정말 즐거운 일이야? ' 반문하며 친정식구들에게 심술도 부렸다. 두 언니 내외나 조카들, 평생 싱글로 살았던 오빠마저 여자친구가 생긴 요즘, 외톨이는 나뿐이다. 수 십 년 전에 과부가 되어 90을 넘기신 우리 엄마조차 아들을 끼고 살며 수시로 드나드는 자식들과 손주들을 보신다. 나는.. 나는..?

없다. 그래서 서러웠다. 넘들이 말해준 '혼자 사는 게 편하다'는 말을 머리로 되뇌며 서글픈 마음을 티 안 내려 노력하며 그럭저럭 지내왔다.


그러나 여기 미국, 딸네집에서 다 무너졌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딸. 살 비비며 우리 딸 우리 딸 하고 싶었던 그 마음을 내 마음대로 꺼내 펼쳐놓을 수가 없었다. 딸이 남편 있는 아녀자가 되고, 30대 중반이 되고, 또 아기 엄마가 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어른'이 되면서, 나의 말, 나의 주책스러움, 또 때때로 아이 같은 나의 감정들을 조용히 평가하고, 재단하고, 지적하는 모습 속에 나는 위축되어 갔다.


나는 점점 입을 닫고, 몸을 숨기고, 자리를 피했다.

음식을 만들고, 세탁기나 세척기, 청소기를 돌리고, 어지러워진 집안을 정리하며 산후조리를 도와주러 온 친정엄마의 도리는 해나갔지만, 아기와 딸네 부부와 함께 있는 자리는 가급적 피했다. 새내기 부모가 된 딸과 사위는 아기를 정성껏 그리고 침착하게 잘 돌보고 있어서, 저들이 집을 비우는 그런 상황이 아니고는 아기 보는 일로 큰 책임이 지워지지는 않았다. 저 둘이 집에 있을 때 나는, 할 일을 마치면 조용히 나의 방으로 들어와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듣고 유튜브를 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애써 자리를 피하는데도 나를 굳이 찾지도 않는 딸내외.


서러웠을까? 서러웠다.

사돈댁의 존재는 나의 소외감을 조금 더 부추겼다.

이곳은 딸내외만 살고 있는 미국 땅이 아니었다. 사돈댁은 딸네 집에서 15분 거리에 있었다.

즉, 딸은 혼인하면서 친정(엄마)을 떠나 미국 최씨네 월드로 들어와 사는 셈. 그분들이 이 집을 손님처럼 오셔서 맘껏 손주를 즐기고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친정엄마는 되어도 친정식구는 될 수 없고나.. 하는 생각으로 자꾸 마음이 작아지기도 했다.


이런 치사하고 복잡한 내 마음은 딸과 대화를 할 때마다 해소되기는 커녕 눈물바다만 만들 뿐이었다. 어떤 때는 딸마저 눈물을 줄줄줄. 대화는 우리 둘의 상황 전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딸과 나 사이의 크나큰 거리감을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서울로 가야지, 얼른 가야지. 날짜야 달려다오. 그런 마음이 푹푹 쌓여갔다.


그런데 서울의 내 집, 내 방 침대에 누운 내 모습을 상상해 보니 거기 또한 마찬가지다.

서울에서는 멀리 있는 딸을 그리워하고, 여기 미국 딸네 집에서는 서울에 있는 나의 자유를 그리워하는 내 모습이라니...


시간이 필요했다.

글쓰기가 어지러운 생각을 정리해 주고 또 힐링이 되기도 했던 것을 알고는 있지만, 컴퓨터 앞에 앉을 수가 없었다. 서러움에 푹푹 절여진 내 마음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겨우 한다는 것이 휘리릭 자전거를 타고 동네에서 멀리 나가는 일이었다. 자전거 타기는 운동도 되었지만, 집안에서 만들어낸 마음의 쓰레기를 밖으로 흩뿌리러 나가는 기회도 되었다. 휘휘 자전거를 타면서 생각도 많이 했다.

나는 결혼한 딸을 온전한 타인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5월도 끝을 내려는 이즈음, 반성의 마음이 이제야 조금씩 생기며 글쓰기를 해 볼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6월이 온다 해도 18번의 밤을 더 보내야 이 집에서 트렁크를 들고나갈 수 있을 텐데 '곧 6월! ' 그 생각만으로 마음이 가벼워지는 걸까.


그러나 사실은 자전거를 타면서 무겁게 나를 누르던 생각들을 바람과 함께 날려 보낸 덕분이다.

여러 날이 걸렸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비워진 마음속에 나의 새로운 생각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던 그 시간들, 그날들이 이제 나를 다시 컴퓨터 앞에 앉게 한다.


딸은 좋은 아이다.

그런데 나처럼 정으로 질질거리는 성격이 아니다. 그리고 딸의 미국살이... 힘들리라.

딸은, 엄마가 글도 쓰고, 책도 열심히 읽는 분이니 덜 감정적이고 의연해지길 바랄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우리 사이의 세대차이를 이제까지 모르다가 이제 확인하고 있는지도.


글을 쓴다는 것은 내게는 자기반성의 시간이다.

그리고 실수투성이의 어린애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내게 '괜찮다'라고 말하는 위로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컴퓨터 앞에 앉아 몇 줄 쓸 만큼 숨구멍이 트이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나는 혼자다, 그런데 괜찮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고 있기 때문인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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