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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비찜을 만들다

미국일기_할머니 되는 나날

by 올리

오월, 서울은 얼마나 빛나고 있을까?

그 첫날에 노동절 휴무가 있어 더 기쁜 마음으로 이 달을 맞곤 했는데,

지금, 나는, 여기 오스틴에서 휴무 대신 사위의 생일로 5월을 맞았다.


사위의 생일...

내가 서울에 있었다면, 딸에게 부탁하여 용돈 정도의 현금을 전하는 정도로 끝날 것이었는데,

여기 그들의 삶의 현장에, 딱 생일 당일에, 그의 집에 계시는 이 장모.

산후조리 중인 딸네 집에서 사위의 생일을 맞는 것은 내겐 새로운 스트레스다.


하루에 한 가지씩, 인터넷 보면서 겨우 음식을 만들어내는 나.

그렇게 만든 음식을 식탁 앞에 올려놓고 딸과 사위와 함께 할 때는 꼭 평가를 받는 듯하다.

그런데 이제는 생일... 상...이로구나.


딸에게 물으니 서로의 생일날엔 외식을 했단다.

그래 그거 좋네, 니들 둘이 외식해...


그런데 이제 이 집엔 옥토끼 같은 아기가 있다. 그 아기를 두고 둘이 굳이 외식을 한다... 고?

이제는 그러기 싫겠지?

그래, 내가 갈비찜 만들어줄게!

이것저것 거나하게 생일상 차리기는 못하겠고, 딱 하나 임팩트 있는 걸로 갈비찜!


사위도 좋아한단다, 갈비찜.

으하하하.


그런데 나, 갈비찜 만들어 본 지 30년쯤 되었다.

신혼 때? 어른들께서 우리 집들이 오실 때?

기억이 없다. 더욱이 LA 갈비라는 조리법이 유행했으니, 그것은 휘리릭 많이 구워봤다. 그런데 갈비찜이라니.. 밖에서 사 먹은 기억만 있구먼. 그래도 힘이 더 들어가고 한국서도 명절 음식인 (나는 안 만들지만) '찜'을 만들어 그거 하나로 생일 기분을 팍팍 내리라.


문제는 시장보기다.

딸의 뒤를 따라다니며 장을 봐야 하는 형편이다. 며칠 뒤에나 만들 음식이라도 기회가 생기면 미리미리 장을 봐두어야 한다, 이곳에서는. 딸이 시내 볼 일이 있다는데 그 옆인 홀푸드마켓에 들를 수 있다 하여 냉큼 따라가 봤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갈비 고기가 없었다. 한국 마트에나 가야 하는 건가. 야채라도 사두려고 보니 역시 한 번에 장만하기는 안될 것 같았다. 우선 당근. 다 손질된 손가락 만한 것만 있다. 모서리 깎기는 안 해도 되겠네.. 싶어 낙점. 무는 바람이 좀 든 것 같은 것이 그것도 토막으로 된 것뿐. 다른 마트 갈 때 살까 주저하다가 이것마저 없을 수도 있으니 아쉬운 대로 장바구니에 담았다.


다음 날 일하러 나가는 딸에게 멀리 돌더라도 H마트에 들러 갈비와 배, 밤, 대추 등 갈비찜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들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딸이 잘 사 왔다. 소갈비와 진간장, 거의 다 떨어져 가는 맛술과 배, 그리고 내가 그토록 연연하는 파까지 듬뿍. 그런데 밤은 없었고, 대추는... 설탕절임이 된 중국 대추 같은 간식거리를 사 왔다. 일단 거기서 만족하고 갈비찜 만들기를 시작했다.

아기 보며 왔다 갔다 이틀에 걸쳐 준비했다. 갈빗살을 물에 담가 피를 뽑고 애벌 삶아 기름기와 잡내를 없앴다. 배 양파 사과 등을 갈아 만든 소스를 부어 애벌 삶은 고기에 붓고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드디어 생일날 아침, 갈비찜 만들기 작업 개시.

웬만해서는 이른 아침에 소음을 만들고 싶지 않았으나 오늘은 특별한 날 아닌가.

바시락, 뜨르륵.. 아침잠을 깨우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도 오늘만은 할 수 없다.

소스에 담금질당한 갈비를 큰 냄비에 쏟아 넣고 가스 불을 댕겼다. 이제는 불이 일할 시간.


다음은 미역국 만들기.

어제부터 불려놓은 젖은 미역에 소고기, 관자 다진 것을 볶고, 믹서에 간 잣물까지 넣어서 끓이기 시작. 서울서 들고 간 육수맛 나는 작은 덩어리까지 동원 가능한 재료는 죄다 집어넣었다. 한 시간쯤 지나니 미역국 솥은 제법 좋은 냄새를 풍기며 맛있게 보글거렸고, 갈비 냄비에서도 그럴듯한 냄새가 솔솔 났다. 이제는 흥건한 국물을 졸여 찜 느낌이 나도록 하면 되는데..


아침 9시 반쯤, 밤새 아기와 씨름했을 딸이 거실로 나왔다.

지글보글한 좋은 냄새를 맡았을 텐데 아뭇 소리가 없다.

제 남편의 생일 아침이니 '밥 먹고 나갈래?' 물으니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살레살레 고개를 가로젓는다.

조금 있다가 사위 등장.

잠이 덜 깬 목소리로 '굿모닝' 인사하더니 오늘의 주인공답게 '아, 맛있는 냄새!'라고 한마디.

그런데 사위는 드르륵.. 커피를 내린다.

밥 먹으려냐고 물으니 그럴 시간이 없단다.


국, 찜, 새로 짓는 밥까지...

일단 중지다.

밥솥은 전기밥솥이니 지가 알아서 다 되면 저절로 서 있을 것이고, 솥과 냄비는...

불을 최대한 줄이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약한 불에서 오래 끓이면 더 깊은 맛이 날 터이니 더 끓여주자.. 는 심정으로. 지들, 나갈 준비 다 되면 나를 찾겠지. 그때 나가서 솥과 냄비의 불을 끄고, 나는 아기를 넘겨받으면 된다. 저 음식들은.. 뭐.. 뭐... 생일날 아침은 여전히 없다니까 저녁에나 먹겠구먼.

새로 지은 밥은 떡밥이 되겠지만, 다 다 저들에게 맞춰주지, 뭐.


그런데, 30분쯤 지났을까?

부엌으로 나가 가스 불을 꺼야 하나 생각할 즈음, 딸이 슬그머니 내 방으로 들어왔다.

밥 먹을 시간이 있으니 먹고 가겠단다. '시간이 얼마나 있는데?'

'한 30분쯤?'


10분이면 상을 차려낼 수 있고, 15분이면 먹을 수 있으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러고는 빛의 속도로 새로 지은 향기로운 밥, 잣까지 갈아 넣은 진한 미역국, 그리고 그리고.. 30여 년 만에 만들어낸 갈비찜까지 차려내었다.


오늘의 주인공께서 '맛있다...'고 하였다.

엉터리 같았던 설탕절임 대추가 갈비 소스랑 잘 어울려 고기인지 뭔지 헛갈릴 정도로 그럴듯했고,

손가락 같았던 당근이나 근본을 알 수 없었던 무, 그리고 쪽파까지 고기와 혼연일체가 되었다.

맛있는 경우 딱 한 번만 '맛있다'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나의 요구에 따라, 사위는 열 손가락을 꼽아가며

'맛있어요, 맛있어요, 맛있어요... 또 맛있어요... ' 그러면서 하하.. 하하하.


지난번 나랑 서먹했을 때 화해의 제스처로 '어머니' 하며 내 어깨를 슬쩍 안아주던 그때처럼,

사위는 아침 상을 치우는 내 옆으로 와서 어깨를 쓰윽 안아주었다.

갈비찜이 고렇게 맛있었단 말이여?

저녁에 남은 갈비찜을 다시 내놓았다.

'와, 하루에 두 번이나 갈비찜을 먹다니, 정말 좋아요. 하하하.'


그날 저녁, 나는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올렸다.

'오늘도 음식 만들기 시험을 통과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사위 생일상까지 차려내며 한층 발전하고 있는 건가?

그런데... 으으... 아아...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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