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성향이 육아에도 정말 큰 영향을 준다.
나는 참 조심스러운 사람이라, 아이들 어릴 때 터치 하나에도 굉장히 조심했었다. 뭐든 쿵쿵하는 법이 없었던 건 나의 기질 때문이었을거다.
아이들 어릴 때 꽃을 꺾는 것도,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가거나 그네를 위험하게 타는 것도 하지말라고 말했었다. 그건 도덕이고, 함께 이용하는 시설물에 대한 규칙이니까 내 아이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아이가 꽃을 꺾어도, 개미를 발로 마구 밟아도,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가고, 그네를 위험하게 타도 그냥 두는 부모님들이 계셨다. 그것 또한 성향이 다르고, 생각하는 기준이 다르니 무엇이 맞고 틀리다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릴 때는, 그리고 내 성향에는 그런 부분들이 불편했다.
나는 아이들의 '놀이'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아이들을 데리고 이것 저것 놀이를 함께 했다. 기관에 보내는 것보다 아이들이 호기심을 가진 것들을 가지고 천천히, 충분히 탐색하고 해 볼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했다. 내가 체력적으로 조금 힘들어도 그건 나의 소신이었고, 내가 힘들어도 타협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고 나니, 또다른 관점으로 육아를 들여다 보게 된다.
이것, 저것 조심하라고 하는 것보다는, 안전상 아주 위험하지 않은 것이라면 해보라고 말해준다. 경험을 해보아야 자신의 몸을 조절하고, 적당히 보호하는 방법도 스스로 터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바운더리는 과감한 육아를 하는 여느 부모님보다는 한없이 조심스럽고 하찮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넓어졌다.
아마도 아이들과 나와의 관계가 거의 전부이던 시절에서, 점점 우리 아이들과 가족 외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우리 아이들과 주변 환경과의 관계로 확장되는 시기로 나아가기에 바운더리를 넓혀주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눈을 뗄 수 없었던 시절에서, 이제는 조금씩 더 아이들을 믿고 내 기준을 내려놓는 시기임을 깨닫는다. 하고 싶은 말은 더욱 삼키고, 아이들의 말을 더욱 귀기울여 들으려고 노력한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가진 장점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귀기울여 듣기'가 있었다. 세상 가장 쓸모없는, 듣기만 잘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육아를 하니, 그리고 점점 나이를 먹을 수록 잘 듣는(듣기를 좋아하는) 나의 성향이 장점이 되기도 하더라.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나대로 육아를 한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하찮은 엄마보다 훨씬 더 멋지고 넓은 아이들로 자랄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