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서 살아봤습니다-20(나의 로망 사이프러스)

Dreams come true.

by AMAP

사이프러스 나무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왠지 이름도 이국적인데다 영화에서도 배경이 남부유럽인 경우 길가에 늘어선 길죽한 사이프러스가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영화 <글래이데이터>에서도 막시무스가 가족이 있는 고향집을 회상하면서 대평원을 거닐 때 저 아래에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줄지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사이프러스는 관련된 신화도 있다. 태양신 아폴론이 키파리소스(Cyparissos)라는 청년을 아주 좋아했는데 그는 어떤 숫사슴과 둘도 없는 친구였다. 하루는 키파리소스가 창을 잘못 던져 그 창에 숫사슴이 맞고 죽어버렸다. 이를 슬퍼한 키파리소스가 따라 죽으려 했으나 아폴론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자신을 영원히 슬퍼하는 존재로 만들어 달라고 아폴론에게 간청했다. 아폴론이 이를 허락한 후 키파리소스는 팔다리가 푸른색으로 변하고 머리카락이 뻣뻣해지며 나무가 되었는데 그게 사이프러스 나무란다. 하여간 고대 그리스는 '뻥'이 끝내주는 나라다. 뭐 웬만하면 다 신화로 엮어버린다니까.


그리스에 갈 때 사이프러스 나무가 많은 동네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집을 구할 때 가장 중요한 조건은 직장과 학교와의 거리였지만 그 다음은 근처에 사이프러스가 있느냐였다. 평수를 좀 줄여도 좋았다. 집 근처에 있어도 좋았고, 예쁘게 조경이 잘 된 아파트 단지에 아름드리 사이프러스가 줄지어 있으면 조금 좁게 살아도 상관없을 거 같았다. 중년 부부의 작은 로망이라고나 할까.


FB_IMG_1748294408348.jpg 아파트 단지 입구

부동산 아주머니와 집을 보러 다니다가 맨 마지막에 딱 맘에 드는 곳을 만났다. 약 40여가구 정도 밖에 안되는 작은 단지였는데 조경이 오밀조밀 아름다웠다. 입구에서 건물까지 약 30~40m 정도 되는데 양 옆으로 아래쪽은 무릎 높이로 관목들이 귀여웠고 무엇보다 관목 뒤에 하늘로 치솟은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멋졌다. 집에 가는 게 아니라 숲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정원 가운데에 작은 분수까지 있어서 운치도 끝내줬다. 문 앞에 관리인이 있어 안전도 괜찮았다. 우리 부부가 예전부터 꿈꿔왔던 '숲 속의 작은 집'같은 느낌 그 자체였다. 평수는 좀 양보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래, 결정했어!


나무 설명 그림.jpg 미루나무 vs. 사이프러스(그림출처 : 네이버)

언뜻 보면 초등학교 운동장 가에 줄지어 있던 미루나무와 매우 비슷하다. 좁고 길게 하늘로 치솟던 모양이 그게 그거 같다. 어릴 때 배운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이 걸려 있네'라는 동요처럼 저 위에 조각구름이든 뭐든 걸려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품종이고 사이프러스는 주로 그리스, 이탈리아 등 남부 유럽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영화 <글래디에이터>도 배경이 이탈리아 토스카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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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고흐 <Cypresses With Two Women>, (우) 시원시원하게 뻗은 아파트 단지 사이프러스

어, 그러고 보니 이 나무가 고흐가 많이 그렸던 그 나무구나! 하늘로 불길이 치솟는 모양으로 물감을 두텁고 거칠게 칠해서 표현한 그 사이프러스. 나뭇가지들은 뒤엉켜서 춤을 추고 구름과 하늘도 회오리가 한 차례 훑고 지나간 듯 어지러운 그림들. 고흐가 정신적으로 아플 때라서 그런 식으로 표현했나보다.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 매일 본 사이프러스는 하늘로 쭉 뻗은 것이 시원시원하고 보기만 좋더만.


우리 부부의 로망이 실현됐다. 매월 정원 관리비로 몇 만원씩 내야 했지만 외식 한 번 안하면 되지. 내가 언제 또 이렇게 숲 속에서 사이프러스를 질리도록 눈에 바르며 살 수 있겠나. Dreams come true.


p.s.) 재미있게도 사이프러스와 미루나무는 비슷한 성격의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있다. 2010년 이스라엘-레바논 국경에서 사이프러스 나무 한 그루가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로 이스라엘군이 벌목하려 하자 레바논측이 사격을 가해 총격전이 벌어진 적이 있다. 마치 1976년 우리나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과 유사하다(이건 미루나무였다). 어쨌든 관계가 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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