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을 때 마셔, 후회하지 말고.
체질적으로 술을 잘 못마신다.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벌개진다. 옆에 있는 사람이 되려 불안해 할 정도다. 그래도 새로운 곳에서 처음 보는 맥주를 보면 한 모금 마셔보고 싶은 욕구가 불끈불끈 솟아오른다.
그리스 마트에도 세계의 온갖 맥주들이 다 있다. Budweiser, Heineken, Carlsburg, Stella Artoia, Erdinger..등. 아주 가끔 마시지만 그래도 어쩌다 알콜이 땡길 때 그리스에서까지 한국 동네 편의점에서도 살 수 있는 이 평범한 맥주들을 마시는 건 심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에 거주한 2년 간은 늘 현지 맥주만 구입했던 것 같다.
우리 동네 마트에서 파는 맥주들은 총 7종이었다(사진 윗줄 왼쪽에서 두번째는 네덜란드 맥주 암스텔).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름을 적어보면 미토스, 엑소, 베르기나, 필스, 지티아, 픽스, 알파 뭐 이렇다. 위 맥주들은 전부 라거다. 어떤 브랜드는 라거와 밀맥주가 같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리스 사람들은 밀맥주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 같더라. 현지 지인들과 가끔 저녁자리를 했는데 그들이 밀맥주 마시는 걸 본 적이 없다.
솔직히 말해서 위 7가지 맥주의 미묘한 맛의 차이는 모른다. 알콜도수가 4도~6도로 각각 다르긴 한데 나같은 사람은 뭘 마셔도 한 컵이면 이미 '구운 가재'처럼 시뻘개진다. 그냥 그리스에서만 마실 수 있는 거니까 '이게 웬 떡이냐'하고 마신 거다. 다만 이들 중에 베르기나는 좀 각별했다. 맛이 아니라 이름 때문에.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포스 2세의 유적이 있는 동네 이름이 베르기나이기 때문이다. 생산공장은 마케도니아 지역이라고 하는데 아마 옛날 마케도니아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그 이름을 딴 것같다.
이런 평범한 맥주들 외에 지역 특산물 맥주도 있다. 우선 산토리니의 Yellow Donkey 맥주이다(Red Donkey, Crazy Donkey도 있음). 산토리니는 언덕이 많기 때문에 당나귀(donkey)를 이용해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며 사람과 짐을 운송한다. 그래서 아예 당나귀를 이 섬의 마스코트로 삼아 기념품도 팔고 맥주도 생산하나 보다. 내가 마셔본 Yellow Donkey 맥주는 뒤끝에 과일향이 났던 기억이 난다. 사실 산토리니에서 무슨 맛이 더 필요하랴, 세계 최고의 주변 경관과 맑은 공기가 그 자체로 맛과 멋인데.
크레타(Crete) 섬의 유명 관광지 레팀노(Rethymno)에도 Brink's라는 이름의 고유 맥주가 있었다. 새로운 걸 만났으니 또 한 번 마셔봐야지. 평소엔 낮술을 매우 부담스러워 하지만 이럴 때는 예외다. 내가 언제 또 크레타에 와서 레팀노 맥주를 마셔보겠는가.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 가능성이 99%아닌가. 맛은 특별히 기억이 안난다. 바닷가 식당에선 눈앞에 펼쳐진 푸르른 지중해 맛으로 먹는 거다. 다른 맛은 관심없다.
평소에 술을 즐기는 스타일이었으면 그리스 동네마다 있는 로컬 양조장을 찾아다니는 여행도 했을텐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아쉽기만 하다. 외국에서는 새로이 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무조건 하고 와야 한다. 분명히 나중에 그립다니까. 와이프랑 돌아가며 운전대 잡고 낮술 한 잔씩 해도 괜찮았을텐데. 이렇게 수 년 전 사진으로나마 아쉬움을 달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