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서 살아봤습니다-32(우아한 여인, 엘리자베스)

케르키라섬 여행

by AMAP

역사에 관심이 많다. 서울 도심을 지날 때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 장소였다거나 과거 유명인사의 집터였다는 표석이 있으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본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학창시절 세계사 책에서 봤던 기억이 나는 도시에 가면 꼭 관련 장소를 찾아가 본다. '여기에서 이러이러한 사건이 있었구나, 이 집에 누구누구가 살았구나..' 하고 생각하며 감동받기도 한다.


그리스-알바니아 국경 근처 이오니아해에 있는 케르키라섬(이태리어로는 코르푸섬)에 꼭 가보고 싶었다. 산토리니나 미코노스 같이 유명하지는 않지만 학창 시절 세계사에서 배운 두 가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첫째, 합스부르크 왕조 여인들 중에 역대급으로 아름답다고 소문난 엘리자베스가 지냈던 궁전이 있고,

둘째, 한 나라의 영해에서 다른 나라 선박이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소위 '무해통항권'이 국제사법재판소 판결로 확립된 장소라는 점이다.


옥주현.jpg 뮤지컬 <엘리자벳> 포스터

몇 해 전 가수 옥주현님이 주연했던 <엘리자벳>이라는 뮤지컬이 대히트를 친 적이 있었다. 이 엘리자벳이 케르키라섬에 잠시 머물렀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비 엘리자벳이다(일명 Sisi). 시시는 언니 맞선 자리에 따라나갔다가 얼떨결에 청년 황제 프란츠 요제프에게 간택당해 황비가 되었지만 본인에 맞지 않는 자리에 오름으로써 평생 불행한 인생을 살았던 여인이다. 자유분방한 기질을 억지로 억누르고 새장 속의 새처럼 살아야만 했고 시어머니에게 인정받지 못해 아이 셋 모두 본인이 키우지도 못했던 불행한 여인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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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대관식 사진, (우) 초상화(사진및 그림 출처: 구글)

Sisi의 슬픈 개인사도 유명하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그녀의 미모다. 어느 유럽 왕가 여인들과 비교해도 메달권 안에는 반드시 든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왕비 대관식 사진을 보면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약간 오른쪽을 바라보는 자태가 고혹적이다. 그림에서도 그녀는 화려한 드레스와 목걸이를 착용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화가를 바라보고 있다. 다만 향후 그녀의 운명을 예감이나 하듯 얼굴이 웃음기는 없어 보이기도 한다(결과론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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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우스 동상.jpg
(좌) 궁전 벽에 걸린 아킬레우스 그림, (우) 궁전 뒷뜰에 있는 아킬레우스 동상

그녀가 아이를 잃고 여기저기 떠돌며 방황할 때 이 케르키라 섬을 발견하고 여기에 머무를 궁전을 건축했는데 그게 바로 Achillein Palace이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좋아했던 캐릭터인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Achilles)의 이름을 땄다고 한다. 아킬레우스를 엄청 좋아했나 보다. 궁전 2층 올라가는 벽에는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의 헥토르와의 싸움에서 이긴 후 죽은 헥토르를 마차에 매달고 질주하는 장면을 걸어 놓았고, 뒷뜰에도 아킬레우스 동상을 세워놨다. 여기 머물면서 아킬레우스 생각하며 답답한 마음을 달랬나 보다.


영-알.jpg 그림 출처 : 구글

또한 케르키라(이하 코르푸)는 선박의 국제해협 항행 관련해서 국제사법재판소가 내린 매우 중요한 판결의 사건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바로 '코르푸 해협 사건(Corfu Channel Case)'이다.


1946년 이 코르푸 해협 통과와 관련해 영국과 알바니아 간에 분쟁이 생겼다. 영국 군함이 코르푸 해협을 통과하다가 기뢰에 대파되었는데 영국은 국제해협에선 타국 선박들이 무해통항권을 갖는다고 주장했고, 알바니아는 연안국의 허가가 있어야만 통항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무해통항권이란 연안국의 평화와 질서를 해치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 선박이 남의 나라 바다를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수 년에 걸친 공방 끝에 국제사법재판소는 영국의 손을 들어주었고 이후 모든 국제해협에서는 일정 조건 하에 무해통항권이 인정된다. 이게 평범한 바다가 아니라니까. 이 역사적인 코르푸 해협을 내가 보고 왔다니!


코르푸 앞바다.jpg 코르푸해협 사건이 벌어졌던 바다

내가 갔을 때는 마침 겨울이라 아테네-케르키라 항공권도 1인당 왕복 10만원도 안됐다. outback 스테이크 두 개 값으로 귀한 경험을 한 셈이다. 유럽 왕가의 한 여인이 살던 작은 궁전과 그리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바다가 한 코리안 중년의 가슴에 무한한 감동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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