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등과 3등도 훌륭합니다.
예전에 어떤 개그 프로그램에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낸 적이 있었다. 한 번 웃고 넘어가는 코미디에 불과할 수도 있었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에 공감했다. 항상 최고(또는 1등)만 대우해 주는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측면을 지적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축구나 야구를 좋아하는 나도 최근 어느 대회에서 우승한 팀은 바로 기억이 나지만 준우승팀은 한참을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세상이 그렇다.
아테네에는 2004년 올림픽 개폐회식을 거행한 스타디움이 있다. 1896년 아테네에서 열린 제1회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의 이름을 따서 스피로스 루이스(Spiros Louis) 스타디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 스피로스 루이스는 사실 대단한 선수는 아니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물장수 출신이었다. 국내 예선전도 거의 꼴찌로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는데 본선에서 당당히 우승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마라톤 경기를 올림픽 예선전과 본선 딱 두 번만 뛰고 은퇴를 했다고 한다. 깔끔하다. 어쨌든 마라톤 1등이라는, 그것도 첫번째 근대올림픽 우승자라는 타이틀은 대단했다. 시상식에서 국왕으로부터 B.C. 6세기경 제작된 유물 도자기까지 선물로 받았고 약 100년 후 아테네 최고의 종합경기장 명칭에 본인 이름이 들어가는 영광이라니!
반면 2등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1896년 올림픽 마라톤에서 스피로스 루이스에 이어 은메달을 차지한 하릴라오스 바실라코스(Charilaos Vasilakos)라는 선수가 있었다. 이 선수는 올림픽 개최 한달 전에 치러진 그리스 대표 선발전을 겸한 Pan-Hellenic 마라톤 대회에서 1등을 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본선에선 2등을 한 것이다. 모의고사 잘 봤는데 실제 시험에선 떨어졌다고나 할까. 사실 은메달도 엄청난 건데 하필 다른 그리스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바람에 '2위 나부랑이'는 잊혀진 존재가 됐다. 결정적 순간 한끗발의 차이가 가져온 결과가 이렇게 엄청나다. 그리스 마라톤 박물관에는 바실라코스의 손자가 할아버지 유품들을 기증해서 전시해 놓고 있다. 이렇게라도 할아버지가 훌륭한 선수였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나 보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분이 한 분 있다. 바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동메달리스트 남승룡 선수다. 영화 <1947 보스톤>에서 배우 배성우님이 연기했던 분이다. 1934년과 1935년 국제마라톤 대회에서도 연속 우승했고 국내 1차 선발전에서도 손기정 선수를 제치고 1등을 했는데 실제 올림픽에선 3등으로 들어왔다. 전 세계에서 3등이라는 게 정말 대단한 업적인데 하필 우승자가 같은 조선인 손기정이었다. 그래서 같이 시상대에 올랐지만(위 사진 맨 앞) 이후 역사는 사실상 손기정만 기억한다. 그래도 남승룡 선수 고향인 순천에는 '남승룡 마라톤 대회'가 있어 그의 업적이 잊혀지지 않으니 다행이다.
그래도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과거에는'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가 반박이 불가할 정도로 초사실적이었으나 요샌 2등이나 3등도 기억해 주는 거 같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못따면 침울해 하던 예전과 달리, 이젠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따도 당사자들도 기뻐하고 팬들도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2024년 파리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고 환하게 웃던 우리 여자탁구 대표팀 선수들이 그 예이다. 얼마나 보기 좋던지!
1등은 당연히 영예롭다. 하지만 꼭 1등이 아니어도 그 과정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모든 사람들 역시 박수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스포츠 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이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