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바래는 것에 대해
거의 모든 아이들이 마찬가지겠지만 아직 세상의 여러 가지 면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저 가족들의 품에서 사랑을 받으며 큰 아이들은 순수하고 연약하다. 그들에겐 그저 세상이 자기 것처럼 느껴지고 아무런 이질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즐거움을 느끼고 행복해할 뿐이다.
시간이 지나 그들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장하며 이젠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인터넷이었다. 인터넷은 나에게 다양한 것을 보여주었다. 이게 정녕 내가 아는 인간인가 싶을 정도의 아름답고 멋진 여성과 남성. 현실과 또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창작물 속의 존재. 그 존재가 자신의 압도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갖가지 역경을 극복하고 원하는 걸 손에 넣는 것을 보면 볼수록 나는 이러한 ‘비현실’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거울 속의 나의 얼굴을 보는 순간, 짙은 이질감을 느꼈다. 그 거울 속에 있는 얼굴은 내가 인터넷 속에서 봐왔던 얼굴에 비해 너무나도 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한테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그걸 통해 무언가를 이룬 게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갖가지 상념이 생겨나면서 나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나를 이루고 있는 세상이 격변했다. 그 이후부턴 사람들에게 나의 추한 얼굴이 보이는 게 너무나도 두려워져(나의 추한 얼굴을 보고 그들이 지을 표정과 말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마스크를 쓰고 다녔고, 내가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내가 무능하고 무지한 사람이라고 무시받는 게 두려웠다)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행동했다. 즉 나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행동한 것이다. 그러니 나의 삶은 이루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졌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나의 내면을 강하게 옥죄었다. 답답했다. 답답했지만 이런 답답함을 벗어던질 만한 자신감은 나에겐 없었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름의 노력을 했다. 그렇지만 –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 큰 진척은 없었고, 시간은 흘러만 갔다. 하지만 꾸준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것인 듯 변화는 찾아왔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산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의 산책은 왠지 모르게 고독의 어두운 면인 외로움이 증폭됐던 하루였다. 그렇기에 더욱 변화가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하루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의 난 몰랐다. 이때의 증폭된 고독이 성장통일 줄은 말이다. 내 앞에서 산들바람이 내 얼굴을 스쳐 지나갔고, 나는 시원함을 느끼며 정면을 응시했다. 그 순간, 나는 내 안에 어떠한 문장이 생성되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 문장을 나직이 소리 내어 말했다.
“빛이 바래는 것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면 삶은 고통스러워진다.”
이 말은, 이 깨달음은 내 삶을 돌아보게 만들었고 나한테 어떠한 힘,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옛날부터 아름다움과 멋짐 등에 무의식적으로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게 된 것 같다. 그렇기에 나의 얼굴을 봤을 때 느껴진 추함은 절대적인 것에 반하는, 사라져야만 하는 것으로 인지되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이젠 알 수 있다. 내가 절대적 가치를 부여했던 아름다움과 멋짐은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들 빛이 바래는 것이라는 것을. 빛이 바래는 것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할 순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이젠 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아름다움과 추함, 능력과 무능력. 이러한 것들은 전부 빛이 바래는 것이라고, 그 가치는 시간이 지나면 퇴색하는 법이라고 말이다.
이 말이 누군가에겐 크게 안 와닿을 수도 있다. 확신하건대 이 말을 고등학교 1, 2학년때의 나에게 들려줘도 그에겐 아무런 감흥이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게 애초에 이 문장은 내가 꾸준히 노력한 과정이 있었기에 생성될 수 있었고, 이러한 과정을 겪었기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문장은 내 노력의 결실인 것이다. 그렇기에 당연히 이 노력의 과정에 어떠한 일이 있었고, 어떠한 자그마한 변화가 있었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결실은 수없이 많은 그럴싸한 문장 중 하나에 불과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