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으로서의 다소 난잡한 글쓰기
내가 초등학생이던 무렵, 나는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굉장히 놀라운 감정을 느낄 때가 있었다. 매번 이런 경험을 하진 않았지만 꽤 자주 느꼈던 것 같다. 그 감정은 나를 슬프게도 했지만 그 이전에 굉장히 복합적인 감정의 작용이었던 것 같다. 우울했다. 외로웠다. 마음의 수족관이 용량을 견디지 못해 터질 것 같으면서도 절대 그 용량을 넘어서는 일은 없었다. 우울하고 외로워서 눈물이 나올 거 같아도 그 감정의 격류는 내 마음을 수차례 간지리더니 금세 사그라들었다.
이 감정을 가족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이 마음의 격류를 치유하고 싶었다. 이 마음을 가족들과 공유해 내 마음이 울고자 하면 울고, 웃고자 하면 웃고, 참고자 하면 참고 싶었다. 물론 이때의 나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즉, 이 마음의 격류를 그저 묻고 살아온 것이다.
묻고 살아가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던 거 같다. 어차피 잠자고 일어나면 사라지는 감정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내 무의식이 내 마음이 어둠으로 잠식돼 간다는 걸 알리는 신호였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다른 요인도 없진않았다. 부모님은 성숙하지 못했고,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나조차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데 남은 오죽할까). 대화를해도 이해관계는 해소되지 못하고 그 과정에서의 나는 오그라들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누군가를 증오하거나 과거에 미련을 갖진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애초부터 무지하고, 어리석으니까. 무엇보다 나는 현재를 살아가니까. 과거의 미련이 현재를 움직이고 그렇다면 미련은 평생 존재할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시답잖은 미련 때문이 아니다. 그저 궁금할 뿐이다. 내게 잊힌, 그렇지만 확실히 내 정신에 각인된 기억, 감정들을 들춰내면 무엇이 나올지. 어떤 결과가 나오든 난 성장할 것이다.
이런 암울한 경험이 내 마음에 스며들었을 무렵, 나는 점점 편안함을 추구하게 되었다. 어떠한 역경에 처해도 그것을 해결하려 하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이 순간은 지나갈 테니까. 이 행동의 결과가 어떨지는 아직까진 경험하진 못했다. 그렇지만 별로 좋진 않겠지.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종종 자존감이 높아 보이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거의 공통된 주장을 하는 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자신의 상황을 말하지 않고, 해결하지 않고, 해결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야.”
맞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굉장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다. 그렇기에 나는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다...... 정말로?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추측해 보자면 우선 내 내면에 문제가 있다. 나는 내 의식의 범위에 들어오는 존재들을 하나하나 신경 쓰는 경향이 있다. 물론 알고 있다. 이런 방식이 쓰잘데기 없고, 별로 좋지도 않고, 신경도 쓸 필요가 없을 뿐더러 조금은 이겨내야 한다는 것을. 내 이성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무언가가 그걸 가로막고 있다. 그 벽이 내가 속세의 번잡함에 물들어서 생겼는지, 또는 환경, 태생적 요인에 의한 발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이 모든 게 벽의 이미지로서 유기적으로 종합, 작동되고 있는 것 같다.
나와 같은 나이의 존재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확실히 그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세계의 모든 것은 전부 허상이다. 그저 뭉쳤다가 사라질 뿐인 허상.’
점점 한계가 느껴진다. 내 사고의 한계가 느껴진다. 결국 그런 거겠지. 자신의 능력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려서 그 과정에서 가치 있는 것을 만들고 또 어떨 때는 한계를 넘어 새로운 가치를 재창조하고. 결국 그런 거겠지. ‘가치’를 만들 뿐, 그 근원에 다다를 수는 없겠지. 그렇기에 방황하는 게 아닐까.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가치를 만들 만한 상황 등등이 생기지 않는다고 해도 그 근원에… 그 진리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방황 따위… 뛰어넘을 수 있을 텐데.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래서 이런 말을 한 거겠지. 사회에 속하라고. - 왜냐고? 그야 우린 진리에 도달할 수 없으니까. 타인과의 사회에서 가치를 만드는 게 편안함을, 안정감을 유발할 테니까. 하지만 그는 - 내 짧은 식견으로 봤을 때 - 단정 짓진 않았다. 사회에 속하지 않는 자, 인간 이상의 존재가 없다고 단정하진 않았다.
난 나의 근원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다. 추측도 할 수 없다. 근원에 대한 일말의 생각조차도 쉽게 할 수 없다(언어로 나타내는 건 더더욱 그렇다). 앞에서도 말했듯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내고 이것이 이 세계의 '나'가 되고 철학적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그렇지만 우리의 가장 안에 있는 근원에 대해선 알 수가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그리고 삶에 대한 고뇌도 나의 근원에 접근하는 게 가능하다면 조금 사그라질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벽이 가로막고 있다. 그것이 내 자아든 의식이든 뭐든 간에. 벽이 딱딱하진 않다. 오히려 말랑말랑하다. 그 말랑말랑한 벽은 자신에게 부딪히는 이에게 “생각 그만하고 잠 좀 자세요”라고 최면을 건다. 그리고 난 그 최면에 걸려든다. 그렇지만… 순순히 걸려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내 사고는 내 안에서 무한히 돌고 돌겠지. 물론 나는 첫 단추부터 잘못 맞췄을지도 모르겠다. 이성을 포함한 우리의 인식체계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답할 수도 있지만 그 답은 내 마음에 닿지 않는다. 어쩌면 생각을 멈추고 내 내면에 깊게 침잠하는 게 오히려 더 확실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보고 있는 관조자가 있다면 그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대체 나는 뭐냐고. 하지만 이 세계 '안'의 내가 아니다. 더 넓은 범위에서의 나다.
내가 나라는 ‘자아’ 안에 있는 동안, 그러니까 내가 내 의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동안에는 나는 어떠한 끝에 도달하진 못할 것 같다. 내 사고는 끝없이 무한하게 돌고 돌겠지.
지금까지 내 내면에 대한 글을 써보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잘 살아가기 위해서. 나 자신을 조금이나마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이것이 내 목표였다만… 잘 됐는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의문만이 더 늘어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