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적 글쓰기 - 0
-1-
언제부터 였을까? 내가 사람을 피하게 됐을때가. 솔직히 잘 기억나진 않는다.
핸드폰 알람음이 나를 깨운다. 아, 벌써 그 날이구나. 나는 핸드폰을 보고 탄식했다. 고등학교 3학년 첫 등교일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때마침 불쑥 방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온다. 아빠였다.
“상우야, 일어나라. 오늘 고3 첫 등교일인 거 알지?”
난 그 말에 건성으로 답하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때, 무언가가 내 뇌리를 스쳐가는 것이었다.
“아빠.”
“응, 아들.”
“나 오늘 학교 안 가면 안 돼?”
“왜, 어디 아파?”
“아니… 그건 아닌데….”
나는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런 내 모습을 보며 아빠는 약간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학교는 가야지.” 아빠가 말했다. “ 학교는 학원이랑 달라. 네가 가기 싫다고 안 가도 되는데가 아니라고.”
아빠의 아무렇지도 않은 딱딱한 말투에 나는 다소 울컥하는 것이었다. 나는 꽤나 진지하게 한 말인데.
몇 달간의 겨울 방학 이후 다시 학교를 가야 할 때는 언제나 힘들었지만 이번엔 좀 다른 무언가가 나를 옥죄어 오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런 고통보다 ‘학교를 가야 한다’는 의지가 더 큰 나머지 난 대충 씻고 교복과 그 위에 두꺼운 외투를 걸친 채 현관문을 나섰다. - 물론 가방도 챙겼고.
역시나 통학로는 학생들로 북적였다. 언제나 등하교를 할때면 느끼는 거였지만 오늘따라 학생들이 더 낯설고 더 무섭게 느껴졌다. 나와는 다른 타인이란 족속들이 나에 대해 어떤 말을 할지, 어떤 표정을 지을 지 나는 너무나도 두려운 것이었다. 물론 내 이성은 말하고 있었다. 이러한 것에 고통스러워 할 필요없다고. 너에게 좋을 거 하나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난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렇다. 나는 ‘이성의 지배자’가 아닌 ‘본능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집과 불과 몇 백미터 거리로 걸어서 십 몇 분이면 도착하는 꽤나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제 이 횡단보도만 건너면 학교 정문이다. 때마침 횡단보도의 불이 빨간 불에서 초록 불로 바뀌고, 난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갔다. 그리고 난 이때 굉장히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됐다.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학교의 정문에 나있는 쪽문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쿵쾅되고 몸이 뜨거워졌다. 마치 이 쪽문이 지옥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것 마냥 날 두렵게 하는 것이었다.
난 금세 몸을 돌려 집 쪽으로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곳에 있기가 힘들었고, 학교에 들어가서 내 새로운 반에 있는 새로운 애들을 몇 미터, 몇 센티미터의 거리에 두고 생활해야 한다는 것은 더 힘들었기에. 지금의 난 나도 모르는 사이 너무나도 절망적인 정신상태에 봉착해버린 것이다.
철컹!
집의 현관문을 닫은 나는 숨을 헐떡이며 내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 인생 동안 한번도 벌어지지 않았던 일이 현실이 됐는데도 난 의외로 냉정했다. 하물며 편안함까지 느껴지는 것이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빠와 엄마는 출근한 지 오래였고, 동생도 이미 등교한 지 꽤나 시간이 지나 있었다. 집에는 쌀쌀한 적막만이 맴돌뿐이었다.
적막을 깨고 몸을 일으킨 나는 등교시간에 맞추기 위해 포기해야 했던 아침식사를 먹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엔 아직 열기가 남아있는 미역국이 냄비에 채워져 있었다. 냄비에 있는 미역국을 그릇에 덜고 밥 말아 먹는다. 그닥 맛있진 않았지만 배가 채워짐과 동시에 정신이 고양됨을 느낄 수 있었다.
밥을 다 먹은 나는 식탁의자에 그대로 가만히 앉아 멍하니있었다.
집 전화기가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난 약간 망설였지만 이내 전화기에 귀를 가져다댔다.
“여보세요.”
[이상우, 담임쌤한테 연락왔다. 너 왜 등교 안 했어?]
나직하지만 날카롭게 고조된 목소리 - 아빠의 목소리였다.
“미안, 학교 정문 앞까진 갔는데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어서.”
[뭐라고? 하아… 왜 못들어간건데?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거니?]
“아니. 그냥… 무서워서… 학교가.”
나는 아빠에게 더 할 말이 있었지만 도저히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의외였다.
아빠는 내 대답을 듣고 연신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목소리를 높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 오늘은 등교 첫날이니 그렇다치고 앞으론 잘 가는거다? 알았지?!]
나는 가볍게 “알겠어”라고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난 전화기가 놓인 서랍장 옆에 안치된 소파에 걸터앉으며 길게 몸을 뻗었다.
순간 온몸에 편안함이 깃드는 가 싶더니 당연하단 듯이 다시 고뇌가 온몸을 덮쳐왔다.
학교에 대한, 아니,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옥죄어왔다. 그들이 자신을 들어내고 표현할수록 나는 마치 벌거숭이가 되는 것만 같은 그 느낌… 심장이 뛰어왔다. - 동시에 자조섞인 웃음이 입가에서 튀어나왔다.
한참을 웃고 난 후 나는 소파에서 부족한 수면 시간을 채우기 위해 그대로 잠에 들며 중얼거렸다.
“미안. 학교 더 이상 못가겠다.”
-2-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맞은편 사거리를 지나 쭉 오르막길을 오르면 금세 산책하기 알맞은 데크길이 나온다.
녹음과 새들의 지저귐으로 둘러싸인 이 데크길을 걸을때면 -언제나 느끼는거지만-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로워지는, 모든 게 고정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오늘도 그런 기분을 느끼며 산책을 하는 매일매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진.
나는 얼추 산책을 끝내고 으레 그랬듯 데크길에 나있는 샛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에는 일반적인 놀이터의 면적만한 공터가 지리잡고 있었다.
나는 근처에 보이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산책하는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평일의 이른 아침, 산책하는 사람이 많은 게 오히려 신기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고3 첫 등교일부터 학교에 안 나간지 약 1주일이 돼 가는 이 시점까지 꽤나 여러가지 일이 있었다. 날 어떻게든 학교에 보내기 위해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는 아빠와 의외로 내 입장을 들어주는 엄마의 의견이 충돌하는가 싶더니 결국 내린 절충안이 바로 이것이었다.
‘학교 등교 시간에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기’.
물론 장소는 도서관이 아닌 공터지만 뭐 어떠한가. 공터에서 독서하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을 마친 나는 들고 온 가방에서 책을 꺼내기 위해 몸통을 옆으로 돌렸다. 그 순간, 공터의 끝자락에 성인남성 크기만한 담요 주위를 네댓마리의 고양이가 둘러싸고 있는 게 어렴풋이 내 시야 안에 들어왔다. 매우 신기한 광경이었다. 산책을 하며 길고양이와 한 두 마리 마주쳤던 게 전부였던 나에게는 꽤니 휘귀한 광경이었고 무엇보다 고양이들이 둘러싸고 있는 저 황갈색 담요가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한번가서 확인해볼까?”
난 그렇게 중얼거리고 몸을 일으켰다.
담요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고양이들의 “냐옹”거리는 소리는 더 커져만 갔지만 고양이들은 신기하게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나는 그런 고양이들의 태도에 더더욱 담요에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담요 바로 앞까지 당도한 나는 유심히 그것을 관찰하였다. 별 특색없는 담요. 단지 그 뿐이었다. 하나 눈에 띄는 점이라면 담요가 전체적으로 볼록 튀어나와 있다는 것 정도?
나는 별 생각없이 쪼그리고 앉아 담요의 튀어나온 부분을 검지손가락으로 꾹 눌러보았다.
온기. 분명하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대체 이 담요 안에는 무엇이 있는걸까?
나는 조심스레 담요의 가장자리에 손을 가져다대고 천천히 그것을 들추어냈다. 궁금해 미칠 것 같은 정신을 추스르고 담요를 들추어낸 그곳엔…
“…”
웬 소녀가 편안한 얼굴을 한 채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나는 이 소녀의 얼굴을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불가항력이었다. 이 소녀의 얼굴을 본 순간 몸도 사고도 모든 것이 정지해버렸기 때문이다.
한 십 몇 초 정도 멍하니 있었을까. 나는 정신이 돌아옴과 동시에 담요에 가닿은 손길을 얼른 치우고 담요에서 등을 돌린 채 조심스레 - 담요 속의 존재가 깨지 않게 원래 앉았던 벤치로 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벤치에 돌아오는 덴 성공했지만 심장이 어찌나 빨리 뛰던 지 도저히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책을 읽으려고 할때면 담요 속의 얼굴이 떠올라 몸이 뜨거워졌다. 몸이 옆으로 뉘어져있었고 기다란 머리카락으로 얼굴이 가려져 있었지만 꽤나 분위기있는 인상의 소녀였다. 이 이른 시각에 왜 이런 곳에서 자고 있는지는 신경쓰였지만 생판 모르는 남에게 관심을 갖고 신경쓸만큼 나는 사람이 좋지도 용기가 있지도 않았다.
책에 집중하지도 못할 환경에 오래있고 싶지는 않았기에 이만 자리를 뜨기 위해 난 가방에 책을 넣었다. 하지만 도저히 몸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성은 이 자리를 뜨는 게 옳은 선택이라고 내 속에서 외치고 있었지만 내 안에 있는, 이성과는 또 다른 무언가는 그냥 그 자리에 있으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냥 이 자리에 가만히 있기로 정했다. 이유가 있는 선택은 아니었다. 그저 날 끌어당기고 있는 무언가에 ‘ok’라는 신호를 보냈을 뿐이다.
난 조심스레 담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 심장이 뛰여왔다. 날 끌어당기는 게 정녕 저 담요,(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 안의 소녀란 말인가?
30분이 지나도, 1시간이 지나도 담요엔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을때쯤 담요에서 팔 하나가 튀어니와 담요를 슬그머니 들춰냈다.
나는 언제 다시 꺼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책을 눈 앞에 가져다대는 시늉을 하며 힐끔힐끔 그 소녀가 몸을 일으키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담요를 개고 기지개를 켜는 소녀의 단정한 몸놀림과 그녀의 발치에서 얼굴을 비벼대고 있는 고양이들은 그야말로 하나의 화폭이었다.
살면서 처음보는 광경에 놀라움과 흥미로움, 한 줌의 두려움에 차있었던 나였지만 이러한 감정은 한순간에 의아함으로 변질돼갔다. (꽤나 거리가 있어서 잘 들리진 않았지만) 소녀가 뭐라고 중얼거리나 싶더니 들고있던 담요하며 지면에 있던 다수의 고양이들이 하얀 입자로 화해 공중으로 사라져가는 게 그 이유였다.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광경을 보고 놀란 난 안중에도 없다는 듯 소녀는 의연한 태도로 데크길로 통하는 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길게 늘어뜨린 흰 생머리와 날씨에 맞지 않는 하얀 원피스, 그리고 샌들을 신고있는 소녀와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걸 느끼자 가뜩이나 빨리 뛰던 심장이 이제는 터질듯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이유 모를 고통. 하지만 싫지 않은 고통이었다.
나는 내 옆을 지나치는 소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소녀는 걸음을 멈춘 채 나를 가만히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의외의 상황에 난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끼며 책을 보는 시늉을 했다. 그 소녀의 얼굴을 계속 쳐다볼 수 있는 용기가 내게는 없었기에.
몇 초 지나지 않아 소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내 마음을 짓누르는 한 마디를 남긴 채.
“불쌍한 사람.”
더 없이 부드러웠지만 더없이 공허하기도 한 목소리. 매우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다소 언짢고 화가 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난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이지만 이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정도로 자존심이 없지는 않았다.
“불쌍하다고요? 됐고, 본인이나 잘하세요. 괜히 생사람 잡지말고.”
“…뭐?”
“그러니까 괜히 시비걸지 말라고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소녀가 가던 길을 멈추고 나를 몇 초간 뚫어지게 쳐다보나 싶더니 이내 내 옆에 앉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너. 내가 보여?”
“보인다뇨? 그게 무슨.”
“말 그대로의 의미야. ‘나’란 존재가 네 감각기관에 인식되냐를 묻고있는 거야.”
“그야 인식되니까 이렇게 대화하고 있는 거겠죠?”
예상치 못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아까의 마법과도 같은 현상이 벌어졌을 때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지만 왠지 무지막지한 일이 벌어진 것만 같다.
아직 날씨가 풀리지 않았음에도 얇은 원피스를 입고, 마법같은 능력을 사용하는 이 신비한 소녀는 흰 머리칼과는 대비되는 검은 눈으로 나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모를 기대감은 청명함으로 두려움은 살을 에는 추위로 변모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시면 부담스럽습니다만?” 내가 말했다.
그러자 소녀는 이제야 정신이 들었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나와의 거리를 벌리더니 이내 땅바닥으로 시선을 떨구며 입을 열었다.
“아, 그… 미안.”
“뭐가요?”
“아까 너한테 했던 말 말이야. 사실 너한테 들릴 거리곤 상상도 못했거든. 그야…”
“그야?” 내가 물었다.
“그야 나는 이 세상의 누구에게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존재니까.”
소녀의 답에 나는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가닿을 수 없는 존재이기엔 이 소녀는 너무나….
“전혀 신빙성이 없다는 사실은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은데요?”
“흐응, 과연 그럴까?” 소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내 말을 증명할 겸 같이 좀 걸을까? 마침 바로 맞은편에 산책길도 있고 말이야. 어때?”
하늘하늘 웃고있는 소녀의 표정에는 일말의 거리낌도 없었다.
“좋아요, 갑시다.” 내가 말했다. 굳이 이 소녀랑 걷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꽤나 마음에 든 제안이었으니까.
걷기를 시작한 지 시간이 꽤나 지났는데도 그녀는 한 마디도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초면인 사람한테 무례하게 굴고 반말하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 아닐테고… 왜 말이 없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순간 갑자기 소녀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울창한 나무 사이를 걸을때면 내가 살아있다는 것조차 잊게 되는 것 같아. 넌 어떻게 생각해?”
예상찮은 질문, 하지만 그 질문의 내용은 나에겐 꽤나 익숙한 것이었다.
“그야 그렇죠. 하지만 허무할 뿐이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소녀는 내 말을 듣고 다소 놀라는 눈치였다. “그치만, 이렇게 산책을 하면 마음도 진정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도 가질 수 있잖아? 전혀 허무하지 않은 걸?”
“뭐… 그럴수도 있겠죠.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요. 그도 그럴게 저에게 있어서 이런 초목 사이를 거닌다는 행위는 삶의 고통을 잠시나마 망각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거든요.”
“확실히,” 소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이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삶은 고통이지. 암 그렇고말고. 그치만 말이야. 이름 모를 소년, 잘 들어. 네가 그 고통을 망각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게 무엇이든 간에 삶이 너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은 사라져가. 슬픔, 분노, 즐거움등의 감정들은 점차 사라져가고 그 처량한 곳에 남는 것은 오직 몸서리 쳐지는 공허함, 딱 그거 하나 뿐이야.”
난 그 말을 듣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우린 계속 걷고 있었지만 내 머리는 마치 커다란 쇼크를 받은 듯 작동을 안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내가 발로 걷어찼던 자명한 사실이 이 소녀의 입에서 서슴없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허… 그렇게 뼈때리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요. 저보다 한참은 어려보이는데.”
“뭐 겉모습은 그렇지. 근데 실제론 너랑 나이 차이 크게 안 날걸? 오히려 내가 누나일수도.”
“에이, 거짓말.”
우리는 이렇게 투닥거리며 산책을 이어나갔다. 주변에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가끔 한 두 명의 사람들이 우리 옆을 지나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돌발상황은 갑작스레 나를 덮쳐왔다.
“이제 슬슬 시간도 지났겠다. 그 눈에 똑똑히 각인시켜줄게. 내가 말한 게 사실이라는 걸.”
그렇게 말하며 소녀가 몇 미터 앞에 있던 노인의 앞에 멀찍이 서더니 예의 그 마법같은 능력을 시전해 권총을 생성해냈다. - 소녀는 지체없이 방아쇠를 당기고, 총구에서는 우렁찬 굉음이 흘러나오며 탄이 노인에게로 쇄도했다.
나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몸을 웅크렸지만 놀랍게도 노인은 멀쩡했다. 하지만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게 노인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소녀의 몸을 ‘뚫고’ 가는것이 아닌가.
“이게 무슨..”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노인은 물리적으로 소녀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내 상식이 파괴되는 것은 아랑곳않고 소녀는 입을 열었다.
“이제 알겠지? …다소 갑작스럽지만 네가 이 상황을 받아들였으면 해. 그야 네 눈으로 직접 본 거잖아? 애초에 난 원래부터 이런 존재였어. 태어날때부터.” 소녀가 날 지긋이 쳐다보며 읊조렸다. “그저… 날 인식하는 네가 이상할뿐이라고.”
소녀는 그 말을 끝으로 내가 걷고있던 방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멀어져갔다. 그러나 어떠한 미련이 남았는 지 걸음을 멈추고 얼굴만 돌린 채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소년 이름은?”
나는 소녀의 물음에 - 방금의 돌발상황도 한몫했다 -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상우라고 합니다. 고3인데 학교는… 안 나가고 있네요.”
소녀는 내 답변에 만족한다는 듯 살짝 웃어보이더니 다시금 발길을 옮겼다.
난 소녀가 시야에서 사라질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난 의외로 소녀가 ‘신비한 능력을 쓴다’라는 사실엔 의연했다. 그보다도 소녀가 아까 공터에서 한 “이 세상의 누구에게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존재”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와 비슷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아무하고도 어떠한 방식으로도 접촉하지 못한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이 놀랍기 그지 없었고, 또한 그럼에도 어떻게 삶을 긍정할 수 있는건지 나는 의문에 찰 수 밖에 없던 것이다.
-3-
의문의 소녀와의 만남이 있고 난 후 약 한달간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아파트 공용 현관문 옆에 배치된 우편함에 한 통의 우편물이 와 있었다. 퇴학 통지서였다. 현실을 직시할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이 사실을 부모님께 전하자 역시나 부모님은 한숨을 내쉬며 내 인생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상관없었다.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든 난 방관자였으니까. 설령 그것이 내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럼에도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소녀를 다시 만나 물어보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절망적인 조건 속에서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냐고. 그것이 너에게 어떤 의미가 있냐고. 하지만 이런 소망도 점차 꺾여 가는 중이었다. 그때의 헤어짐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공터를 찾았지만 소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어떠한 연락 수단도 나에겐 없었으니까.
심란한 마음을 추스르고 난 줄곧 갔었던 카페에 들어섰다.
창가에 앉은 후 주문한(결제한) 음식을 기다리며 난 니체의 저서를 탐독했다. 니체의 글은 강인한 생명의 에너지가 느껴지는 글로서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강렬한 정신의 힘을 느끼게 하지만 - 지금으로선 - 그것으로 끝이었다. 난 니체의 글을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내 마음을 엄습해왔다. 누군가 나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은 위화감이. 나는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카페에는 종업원들과 나를 제외하고 딱 한 명의 사내가 내 맞은편에 앉아있었다.
그 의문의 사내는 시대 착오적인 복장에 실크해트를 쓴 채 고풍스런 몸짓으로 차를 마시고있었다. -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내 시선이 가닿는 게 느껴지는 지 사내는 찻잔을 식탁에 두더니 놀랍게도 나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도 얼떨결에 눈인사를 하긴 했지만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내 벙벙한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사내는 나에게 다가오면서 두 손을 가슴께로 들어올렸다.
“워워, 진정하세요. 다소 급작스럽긴 합니다만 위험을 가할 의향은 없으니 안심해주세요, 이상우님. 그저 현 상황에 대한 설명과 그에 따른 제안을 하러 왔을 뿐입니다.”
“설명? 제안? 그건 그렇고 어떻게 제 이름을 아시는지…”
“아, 저라는 작자가 다소 성급했군요.” 사내가 말했다. “전 차원관리국에서 나온 조르주 셍피르라고 합니다. 아마도 ‘신비의 소녀’ 건에 대해서 찾아왔다고 하면 납득이 되실런지 모르겠군요.”
“아…그렇군요.” 나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소녀와의 만남 이후 초현실적인 것이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까.
“대충은 납득했어요. 그렇다면 무슨 연유로 절 찾아오셨나요?”
조르주는 잠시 놀라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이해가 빨라서 다행이군요. 다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일단 앉도록 하죠.”
우리는 같은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았고 조르주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상우님, 저희들 차원관리자들은 정해진 규칙과 질서에 따라 안정적이게 작동하는 세계를 ‘가능세계’라고 명명했습니다. 상우님이 살고 계신 세계도 일종의 가능세계죠. 그리고 이러한 가능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인과율의 사슬에 의해 돌아가고 모든 것이 이미 예정되어있습니다. 즉 인간의, 세계의 운명이 결정돼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의 과정을 관리하는 것이 저희들의 몫이고요. 하지만 문제는 가끔 이러한 불변의 원칙에 오류 덩어리가 개입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상우님이 만났던 예의 그 소녀처럼요.” 조르주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죠. 상우님, 그 소녀와의 만남에 대한 기억을 저희가 삭제하는 대신 상우님에게 안정적인 미래를 보장해드리겠습니다. 어떠신가요?” 조르주가 자신있게 물었다.
“안정적인 미래라면 무엇을 말하는 거죠?”
“상우님의 인과율을 조정해 새로운 결과를 도출한다는 의미입니다. 저희들 관리자에겐 세계 전체 운명에 위배되지 않는 한, 개개인의 운명을 바꿀 권한이 있거든요. 형식 같은 건 상관없습니다. 돈 많은 백수가 될지, 아니면 성공한 사업가가 될지 등, 선택은 오로지 상우님의 몫입니다.
“음…” 사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인생의 긴 여정에 있어서 그저 매우 작은 조각이 사라질 뿐이지않는가? 하지만…
“싫다면요?”
“…네? 지금 뭐라고?”
“그 제안, 거절하겠다고요. 저는… 그 기억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요.”
내 말이 있고 나서 장내가 한순간 차가워진 건 기분탓일까? 조르주의 표정이 안내원이 고객을 대하는 표정에서 점점 낮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다소 무서운 인상이었지만 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제게 있어서 아무런 노력없이 이뤄지는 성취는 아무 가치가 없어요. 하물며 그런 허울뿐인 성취를 ‘받기’ 위해 제 ‘소중한’ 기억을 팔아야하다니. 무리입니다. 저에겐.”
내 대답을 줄곧 듣고만 있던 조르주가 턱에 두 손을 괸 채 입을 였었다.
“상우님. 상우님이 아직 어려서 그런 ‘찌꺼기’한테 미련을 갖는 건진 모르겠지만 제 제안을 수락하신다면 더 많은 것을 손에 쥘 수 있습니다. 돈, 권력, 명예, 여자, 그 무엇도 얻을 수 있는데 말이죠. 왜 이 자명한 사실을 모르실까요.”
“조르주 셍피르 씨. 제가 봤을 때 당신은 두 가지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나는 그를 강하게 째려보았다.
“그게 무슨?” 조르주의 얼굴에 약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 분명히 말했습니다. 노력없는, 그저 주어지는 성취는 무의미하다고. 그리고,” 난 약간 언성을 높였다. “당신은 그 사람에게 ‘찌꺼기‘라 부를만한 그 어떠한 권한도 자격도 없어.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건… 오직 자기 자신 뿐이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카페의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 순간 뒤에서 조르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지않아 후회할 날이 찾아올겁니다.”
조르주와의 만남 이후 난 그 사람과 만났던 공터로 직행했다. - 어쩌면 재회할 수 있을 거라는 헛된 기대감에 의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소녀와의 짧은 만남이 시작됐던 공간에서 이젠 내 마음을 비워내고 싶었을 뿐이다.
공터에 와보니 - 날이 풀려서 그런 지 - 산책하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바람도 시원하니 내 육체를 시원하게 해주었다. 그 시원함이 정신에까진 미치지 못했지만. 나는 하늘 높이 뻗어 있는 나무 줄기를 쳐다보며 내 인생에 대해 생각했다. 인생은 나에게 여러가지 것들을 보여주었지만 결국은 모든 것들이 무의미로 귀결되었다. 대체 왜 그런 것일까?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나에게 있어서 삶은 무의미로 점철돼 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퇴학처분을 받았음에도, 원하는 게 멀리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행동도 변화도 할 수 없는 내 나약함. 이런 나라는 존재가 과연 살아갈 가치가 있는걸까?
“…죽고 싶다.”
“바보야. 그게 아니잖아.”
“뭐가 아닌데?”
얼떨결에 대답을 하긴 했지만 내 주위에는 사람 한 명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리운 목소리였다.
“미안해. 널 혼자 두고 가는 게 아니었는데.”
“이 목소린…”
내가 앉아있는 벤치 뒤에서 하얀 입자가 응축되더니 이내 사람의 형상을 띄기 시작했다. - 그 사람이었다. “ 응, 나야. 오랜만이야. 이상우.”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어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픈 기색이 얼굴에 감돌았다.
그녀를 보자 통제되지 않는 감정이 치밀어올라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난 눈물을 닦아내고 마음을 다잡았다.
“오랜만이네요.”
“헤에, 우는거야? 죽고 싶다는 놈이 우는 건 좀 반칙아닌가?” 그녀가 장난기 어린 채 물었다.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와서 하는 말치고는 썩 유쾌하진 않네요. 그건 그렇고 왜 다시 왔어요? 저 같은 건 그냥 내버려두지 그러셨어요.”
“어떻게 내버려둬. 이 세계에서 어쩌면 전 차원에서 날 알아보는 게 가능한 유일한 사람을.”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맙네요.” 난 잠시 망설였다. “몇 달 전부터 찾아다녔어요.”
“알고 있어.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난 그녀의 말에 다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배신감이 마음속에서 샘솟았다.
“근데 왜 이제서야…”
“오해하지마.” 소녀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너를 위한, 네가 살고 있는 세계를 위한 일이었으니까.”
“세계를 위한 일이라… 말 한번 거창하네요.”
“진짜야. 차원 관리자랑 이야기도 나눴으니까 언뜻 알겠지만, 네가 오류에 의해 날 인식하고 그에 의해 품은 ‘어떠한’ 관념이, 얼핏보면 너무나도 사소해보이는 그 관념이 세계의 전체 운명에 위배되는 결과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그렇기에 관리자는 널 만나러 온 거겠지. 뭐 여기엔 좀 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지만 어쨌든 크겐 이정도야.”
“그럼 한 가지 묻겠는데요.”
“응. 뭔데?”
“세계의 운명에 위배되는 관념을 제가 계속 품고있으면 어떻게 되는거죠?” 내가 물었다.
소녀는 기다렸다는 듯 내 물음에 답했다.
“가능세계가 그 운명에 위배돼 비-가능 세계가 되면 세계는 차츰 기능을 상실해 무너져내려. 태엽 장난감에 불순물이 들어가면 장난감이 조금씩 그 기능을 상실해가는 거처럼.”
“아…”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약간 의기소침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어떡하죠?”
그녀는 내 말이 있고 나서 잠시 말이 없었다. - 어느새 내 옆에 앉은 그녀는 무언가 생각하는 거 같으면서도 그저 멍하니 있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상우야.”
“네.”
“그때 카페에서 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거야? 그 관리자의 말은 그렇게까지 틀린 말은 아니잖아. 정말로…”
“그건 제가 느끼기 나름이죠.” 나는 그녀의 말을 끊고 말했다. “똑같은 하늘을 봐도 그것을 통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살아갈 희망을, 가치를 느끼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요.”
“그럼 말이야. 그 추억을 위해 세계가 멸망하는 과정을 묵시할 수도 있어?”
“흐음. 그건 좀 어려운 질문인데요?”
“후후, 뭐 좋아. 상우야, 나 정했어.” 그녀가 벤치에서 일어나며 주먹을 힘껏 말아쥐었다.
“뭘 정해요?”
“정했어. 널 도와주기로. 그러니까 나와의 추억을 잊지 않으면서도 이 세계를 지킬 수 있게 널 도와주겠다고.”
“허어… 그런 게 가능하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죠. 근데 그렇게 정한 이유가 뭐예요?”
“이유? 음…” 소녀는 잠시 고민했지만 바로 말을 이었다. “알려주기 싫은데?”
“...에?”
“왜 도움받기 싫어?”
“아니요. 그럴리가.”
“좋아.” 그녀는 헛기침을 하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제논. 성은 없어. 앞으로 잘 부탁해.”
그녀의 부끄러워하는 태도가 의외라고 생각하며 나도 손을 내밀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잘 부탁해요.”
이로써 격동의 톱니바퀴는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 너머에> 끝.
끝맺는 말: 이 글은 열린 결말입니다. 그것도 그 폭이 꽤나 넓은 열린 결말 말입니다. 몇 년전 이 글을 쓰고 있던 저는 이 이후의 이야기도 구상을 했지만 이 이야기와 연결돼있으면서도 외접해 있는 제 지금까지의 다양한 글들이 이 폭을 채워넣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그렇기에 전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이 소설이라는 형식으로의 그 너머는 끝이 났지만, 이 소설의 코어는 그 형식과 내용을 달리해 계속해서 지속해 나아갈 것이라고. 앞으로 이 공간에 올릴 글들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