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바람을 쐬면 느껴지는 것들
수면 7시간 이상. 꽤나 힘든 퀘스트다. 몇 번이나 이 일일 퀘스트를 수행 못했는지 세지도 못하겠다. 하지만 해야겠지. 나를 성장시키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니까 말이다.
원래는 자고 있을 시간에 이 글을 쓴다. 나는 다시 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내가 성장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의 육체는 바라는 게 너무 많다. 바라는 것만 있다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를 타락하게 만든다는 것에 있다. 육체는 쾌락을 원한다. 더 정확히 짚어보자면 쉽게 얻을 수 있는,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자극을 원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극은 그다지 질 높은 자극이라 할 순 없을 것이다. 전의 글에서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했지만, 이와 같이 질 낮은 자극은 우리들의 조절 능력을 빼앗아간다.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강인하고, 깨끗한 의지’를 더럽힌다. 여기서 조절 능력이란 육체의 악함에서 오는 장애물들을 뛰어넘는 능력을 의미한다. 혹자는 이런 식으로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본인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라면 이러한 쾌락을 느끼는 게 뭐 대수라고. 적당히 느끼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럴지도 모른다. 지친 일상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쾌락들. 이 얼마나 달콤한 속삭임인가. 하지만 말이다. 한 가지 간과하는 게 있다. 자전거를 타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내리막길을 신나게 내려가고 있는 사람이 갑자기 자전거를 멈추고 내리막길을 도로 올라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두 번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마음. 이러한 마음이 그 사람을 육체의 노예, 삶의 노예로 만들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글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것이 아니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성장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지만 여기서 말하는 성장은 육체적 성장보단 정신적 성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조절 능력을 잃고 육체의 노예가 되었던 나는(지금도 크게 차이는 없지만) 노래를 들을 때 가끔 정신이 탁 트일 때가 있다. 노래에서 나오는 목소리,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나의 타락한 영혼에 시원한 바람을 불러일으킬 때 나는 마치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소중한 무언가를 상기하게 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왜인지는 지금으로선 정확히 설명하긴 힘들지만 이러한 기분은 나로 하여금 육체의 노예가 된 나를 반성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나 자신을 성장시켜야 돼야 한다는 왠지 모를 의무감. 이에 대한 강인한 의지가 느껴지는 것이다.
정신적 성장은 나라는 존재를 근본적으로 바꾼다. 나를 이루는 가치관,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것을 넘어 확장시킨다. 계속해서 변화하고 확장된 것의 최후에 무엇이 남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이 뭐 크게 중요한 것인가?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더 풍요로워지고 그로 인해 나라는 존재를 더 높은 차원의 존재로 만들 수 있는데 말이다. 그것이 천사의 길이든 악마의 길이든 말이다. 나는 나를 성장시키며 나에게 어떤 잠재력이 있고, 무엇이 가능한지 알고 싶다. 그도 그럴 것이 쾌락에 절은 후의 무력감을 느끼며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싶은 자는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