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적 글쓰기 - 2
어떤 형태가 되든 지 간에 전에의 글들보단 좀 더 긴 글을 전개해볼까 한다. 이제껏 나는 내 사유의 전체를 부분화하여, 또는 축소하여 글을 써왔다. 하지만 이제부턴 새로운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무엇보다 내 정신이 그걸 원하고 있으며 이 전환은 하나의 성장-이미지를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 긴 글을 전개함에 있어서 특정 개념, 또는 명제가 필요해 보인다. 최소한의 길잡이는 있어도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난 개념과 명제 중 하나를 우선적으로 선택할 것이고 난 명제를 선택하겠다. ‘난 어째서 성장하길 희망하는가?' 또는 ‘난 어째서 성장의 과정 속에 존재하는가?’라는 두 명제를.
우리는 간혹 오해하곤 한다. 삶을 살아가는 것 안에 성장이 밀접하게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정말 그런 걸까? 24시간 동안의 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성장 시간은 매우 예외적이고 특별한 시간이다. 생리적 활동과 습관에 의한(여기엔 반복되는 일상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행동과 수면 등 우리의 하루는 이상의 것으로 점철돼 있다. 나는 여기서 묻고 싶다.
그렇다면 삶은 무엇에 집중돼 있는가. 무엇에 더 치중돼 있는가. 설령 삶 속에 성장이 있다 해도 그 관계는 본능과 습관에 비해선 미미하다. 본능과 습관으로서의 삶과 성장으로서의 삶. 둘 중 우리는 전자로서의 삶을 ‘일단’ 우선적으로 전제하고 삶의 ‘기본적' 의미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 성장은 삶에 있어서 예외적이고 고통을 촉발한다. 고통이 고귀한 아름다움으로 가기 위한, 또는 그것을 느끼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루트라 할지라도 고통이 삶의 중심에 서기에는 우리 인간은 너무나도 나약하다. 반면 본능과 습관은 우리 인간의 생명을 유지해 주고 안정성과 편안함을 제공해 준다. 그렇기에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삶은 본능(욕구, 욕망)과 습관으로 점철돼 있으며 성장은 그저 삶의 예외적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단순 신체의 성장이 아닌 인간 정신의 내적 성장. 진실된 마음으로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삶이 곧 성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함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잠을 자고 음식을 섭취하고 생리현상이 원활하게 일어나고, 본능에 의해 다양한 욕망에 이끌려 자신의 심신을 움직이는 이 모든 것들은 일상적이고 반복적이다.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기도 하다. 수없이 많은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기계적 반복’ 말이다.
그렇다면 성장은 무엇인가.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그런 성장은 무엇인가. 나는 앞서 특정 명제를 설정했고, 그 명제의 키워드는 다름 아닌 성장이었다. 삶의 예외적 요소에 속하는 성장을 나는 왜 앞서의 명제에서의 키워드로 삼은 것인가? 이것은 그야말로 삶과 사유의 대립이다.
삶의 일반성 (욕구, 욕망, 습관)으로서의 전자와 삶의 예외성으로서의 후자의 대립, 이 대립으로서의 관계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결함이 전제돼 있으며 결함을 포괄하는 이 관계는 고통을 동반한다. 삶의 일반성에 삶의 예외성이 가중되면 가중될수록 고통은 심화된다. 이것이 바로 '성장은 고통을 촉발한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성장은 삶의 주축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고통은 기존 질서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점유할 수 있다. 성장이라는 고통을 회피, 망각하고 기존 질서에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고통을 받아들여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것인가,라는 두 선택지가.
기존 질서라 불리는 것은 특정 개인에 한해서는 선험적인 것이다. 기존의 것은 이미 그 개인이 태어나기 전부터, 즉 경험하기 이전부터 구축되고 체계화 됐을 테니까. 우리는 수동적으로 - 강제적으로 - 기존 질서에 비자발적 참여를 당해버리는 것이다.
질서는 신이 부여한 게 아닌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불완전한, 그런 결핍으로서의 인간들이 말이다. 설령 인간들이 합세해 자신들의 결핍을 해소할 상호보완적 관계를 형성한다 해도 인간의 결핍성은 사라지지 않는 데 그 이유는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 사이에는 가로지를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질서라는 완전함을 갈망하는 불완전한 틀은 다수의 적응자도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다수의 소수자도 만들어낸다. 적응자와 소수자, 그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구별되는가?
글을 전개하면 할수록 성장과 고통의 연결고리는 그 세기를 더 확실히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응자와 소수자가 느끼는, 그리고 형성하는 고통의 형태는 너무나도 다르다. 적응자는 사회가 정한 틀에 따라 고통을 형성하는데 반해 소수자는 사회와 사회 너머의 경계( 어쩌면 경계 저편까지도) 속에서 고통을 형성한다. 적응자의 고통은 앞서 말했듯 사회 틀 안에서 형성되기에 그 해소 방안이 소수자의 고통 해소 방안에 비해선 보다 쉽게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후자의 고통과 관련해서는 실질적인 방안을 모색하긴 지극히 힘들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고통이 지시하는 곳에 사회는 결코 가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소수자의 고통은 오로지 그 개인이 감당해야 하며, 어쩌면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 너머에 가닿아 있는 고통을 망각하고 사회가 지시하는 고통만을 인식할지, 아니면 이 두 고통을 모두 인식할지.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될 것이다. 특정 개인이 적응자 ‘또는’ 소수자가 아니다. 특정 개인은 - 우리 인간은 - 적응자 ‘그리고’ 소수자다. 즉 우리 인간의 내면엔 적응자로서의 자아와 소수자로서의 자아가 공존하는 것이다. 그저 이러한 공존을 의식하거나 못하거나, 또한 이 두 자아가 발현되고 작동되는 정황의 차이가 있을 뿐.
적응자와 소수자를 한 개인의 종합으로 보게 된다면 새로운 사유의 지평이 열리는 데 그 결과물로 제시되는 것은 바로 성장의 이중성이다. 적응자로서의 성장과 소수자로서의 성장이 다름 아닌 성장의 이중성인데 이 두 성장은 지시하는 방향에서 차이가 있다. 그것은 바로 공통성과 특이성이다. 사회의 메커니즘, 또는 사회의 질서로서의 공통성은 적응자적 요소이기에 그 반향은 미미하고 일상적이다. 분명히 이것은 성장이지만 고난과 시련을 뚫고 고통을 가로질러 쟁취하는 짜릿함으로써의 성장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설령 우리에게 어떠한 흥미를 제공한다 할지라도 결국 짜여진 틀 속에서 제공되는 놀이 따위, 금방 시시해질 따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시시한 놀이 속에서 사회가 유지되는 이유는 공통성과 특이성은 다수이자 하나이며 하나이자 다수이기 때문이다.
공통성의 시시함에 인간의 내면에 깃든 소수자로서의 특이성이 개성으로서의 차이를 부여하는 것이다. 꽉 막힌 시시한 놀이의 공간에 전에 보지 못했던 경치가 보이는 창문을 설치해 주는 것이 특이성의 역할인 것이다.
특이성은 소수자적 자아와 연결된 개념으로서 사회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아직 사회화되지도, 정형화되지도 않았지만 그 무엇보다 빛나는 원석을 사회 너머로부터 캐내 그것을 다듬는 것. 이것이 소수자로서의 성장이다.
공통성과 특이성이 관계 맺고 있다는 것은 사회 또한 사회 너머와 어떤 유의미한 창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인간은 사회라는 질서 속에서 안정감을 얻고 평화와 안전의 요소 또한 일정 부분 이상 부여받는다. 사회와 자기 자신의 자아를 - 자의든, 타의든 - 동일시해 적응자적 성장을 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질서 속에서‘만’ 있어서는 이 사회에 앞서 말했던 창문은 현시되지 않는다. 오직 공통성과 특이성의 조화만이 사회뿐만 아니라 인간 내면의 균형 잡힌 성장을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난 어째서 성장하길 희망하는가?”라는 앞의 명제에서 희망은 결핍을 의미한다. 결핍되지 않은 걸 희망할 만큼 우리 인간은 가볍지 않다. 복잡함의 무게에 짓눌려 결핍되지 않은 것에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계속해서 형태가 변하는 결핍에 놀아난다. 충족된 것에 시선을 집중하기엔 결핍으로서의 희망의 욕망은 너무나도 강렬하기 짝이 없다. 그렇기에 난 희망하는 것이다. 아니, 욕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의 주제인 성장은 그저 내 욕망이 가리키는 다양한 요소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욕망 = 성장’이라는 등식이 성립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균형 잡힌 사회는 공통성과 특이성이 같이 작동되는 사회다. 특이성이 공통성에 차이적 요소를 개입함으로써 사회구성원의 욕망을 촉발시키고 삶을 계속해서 붙잡을 힘을 주입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힘은 반동적인 것이다. 마취제를 맞아 강제로 잠에 드는 무능력한 생명체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러한 관점을 인간 내면으로 돌려본다면 적응자는 소수자의 목에 줄을 매달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지만 그 너머를 진정으로 지향하진 않는다. - 그럼에도 지향 가능한 적응자도 존재할 것이다. 물론 사회와 그 너머 사이에 나있는 경계를 넘어서진 못하겠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형태는 진정으로 성장의 형태를 구성하진 못할 것이다. 욕망은 성장의 원동력이지만 소수자가 적응자의 노예로서 존재하는 한, 욕망은 충족될 뿐 그 알을 깨부숨으로써 성장으로 나타나진 않을 테니 말이다. 한 개인에 깃든 적응자와 소수자. 이 두 자아 중 사회 너머에 접속 가능한 자아는 소수자, 즉 소수자적 자아뿐이다. 그렇기에 소수자적 자아를 노예화하는 행위는 자신의 가능성을 막고, 그저 충족하고 그저 만족하는 그런 반동적인 인간으로서만 삶을 영위해 간다. 소수자적 자아가 노예화된 상태에서는 삶을 정상적이게 유지할 정도로만 특이성을 생산한다. 하루하루 다른 기분과 음식과 노래 등과 같은 특이성을 잘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허겁지겁 잡아채면서 말이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쐬지만, 정작 창문 너머의 그 아름다운 경치는 미처 보지 못하는 그런 아둔한 인간들… 즉, 소수자적 자아를 노예화시킨 자들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난 사전적 정의를 거부한다. - 물론 이 실험실에서 만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이 글을 원활하게 써 내려가기 위해 대부분의 개념들은 사전적 정의에 따랐지만 내가 실험화시킴으로써 그 무한성(무한한 성질)을 뽑아낸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장이란 개념이다. 이 성장이란 개념의 나의 정의는 지금까지의 글을 통해 충분히 추론할 수 있겠다만, 그럼에도 기본적인 틀을 제시한다면 다음과 같다. 성장은 인위적이고 강제적이다. 다시 말해 성장은 자연적 증폭과 대비되는 강제적 증폭인 것이다. 또한 - 계속 말하지만 - 성장은 고통이며 고통 없는 성장은 우리에게 제시되지도 않는다. 설령 고통이 없거나 그 고통이 미미한 성장이 실재한다 할지라도(인간의 발육, 상처의 치유 등) 그것은 그저 지나감이고 흘러감이며 ‘느낌’으로만 실재할 뿐이다. - 이러한 “느낌”은 성장하기 위한 발판으로 기능할 수는 있지만 성장 자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성장 속에 고통은 필연적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성장 안의 고통의 생성 원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또 다른 주제이고, 여기서는 - 내 정의에 따른 - 성장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 내면을 촉발하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우선 특이성을 노예화시킨 개인에게 성장은 그저 충족이며 삶에 대한 폭주를 막는 억제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전복이 필요하다. 적응자와 소수자 관계의 전복이 - 어쩌면 전복보다는 회복이 - 말이다. 소수자는 자신의 목에 걸려있는 줄을 끊어버린 채 적응자에게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필요성이 있다. 사회를 유지하고 기본적인 뼈대를 세운 것은 공통성의 발현이지만 그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고, 삶에 가치와 희망을 부여하는 것은 (근본적인 측면에선) 특이성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였으며, 하나여야만 하며 앞으로도 하나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을 특정한 위계질서 안에서 보는 것이 아닌 절친한 친구 사이의 우정의 관계로 봐야 하는 것이다. 이때에야 비로소 성장은 노예화된 소수자가 아닌 적응자와 수평적 관계를 맺고 있는 소수자와 만나 제 기능을 발회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성장은 단순한 억제제가 아니며 소수자로서 특이성을 갖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직시하며 사회 너머와의 맞닿음을 형성하게 만든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성장에 대한 실천적 규정은 아직 제시되지 않았다고. 이에 대한 의문은 타당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나로선 제시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성장은 소수자의 산물이고 특이성의 산물이다. 각 개인의 소수자적 자아에 집중하고 그 특이성을, 이 공통성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빛이 바래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니까. 실천적인 것은 언제나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여기‘에 집중돼 있지만 난 당신의 삶에 대해, 뿐만 아니라 사람마다 무한히 변주하는 그 복잡난해한 심연 안에 깃든 소수자적 자아를 온전히 마주하는 건 나로선 불가능하니까.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 욕망 때문이기도 하지만 - 그 실천적 규정을 가능하게 만드는 몇 개의 실마리 정도는 사유를 통해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난 사유를 통해 적응자적 자아와 수평적 관계를 맺는 소수자적 자아를 사회 너머에 맞닿게 하는 것이 온전한 성장의 역할이란 결론을 내렸지만 이 틀에 채워 넣을 반죽을 만들 존재는 오직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