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위사실을 위한 예비고찰

실험적 글쓰기 - 1

by 이상우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계속해서 들여다보는 것은 진절머리 나고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있는 그대로'는 날 자극시키지 못한다. 날 허무에 사로잡히게 할 뿐이다. '있는 그대로'를 인위화 시킬 때에야 비로소 허무는 긍정의 향기를 내뿜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도로에 차들이 지나간다', ’ 길가에 사람들이 대화를 나눈다' 등등, 이러한 단순사실들이 뭐 어쨌다고? 이러한 것들은 그저 흘러갈 뿐이다.


흘러가는 것은 붙잡지 않는 이상 흘러감은 인간을 멍 때리게 만든다. 있는 그대로의 단순사실들을 인위사실로 만들 필요성이 있다. 우선 즐겁고, 인생을 멍 때리고만 살아갈 순 없으니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인위적으로 조작함으로써 인간은 체계를 세우고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난 일찍이 자기규정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지만 그때의 글은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글로서 그 글과 외면해 있는 사고를 통해 자기규정을 현실 속에 집어넣어야 했다.


난 전의 글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규정해 나가는 삶'의 중요성을 제시했고 이에 대한 입장은 지금에 와서도 변함없다. '자기를 규정한다'에서 자기, 그러니까 '나'는 명확한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것을 분석하려고 하면 할수록 알 수 없음으로써의 무한루프에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현상하지만 결코 그 미지의 가면을 벗는 순간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로지 나에게 가능한 것은 '나'라는 코어에, 핵심에 다양한 부품을 조립하고 '이건… 이거다!'라고 얘기하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다. 난 이 글을 쓰기 몇 년 전부터 코어에 여러 요소를 개입시켜 왔지만 그러한 진행상황을 명확히 규정한 적은 이때까지 없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난 이 글을 쓰고 싶어진 것이다. 찬란히 빛나는 욕망이 저 미지의 존재를 지시하기에.


나는 이렇게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난 어떤 존재자로 규정되는가?'... 넌 누구지? 난 존재하게 된 존재자다. 일정하게 반복되는 삶의 한 측면에 서 있는 자이면서도 차이의 반복의 삶의 한 측면에서 삶을 긍정하고 화창한 날씨를 품고 있는 창문을 열어젖히는 자이기도 하다. 난 ‘나'라는 창조를 가슴속에 지니고 그 창조를 열심히 촉발시키는 존재자다. 난 어설프고 불안정하지만 '독서하는 자'이고 작가이다. 좁은 구멍에 고독을 품고 홀로 서있지만 결코 강인한 생명력을 잃지 않는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창조자로서의 존재자다.


이 글의 내용을 보고 있다 보니 ‘강인함’이라는 개념이 내 안에서 흘러나온다. 물론 강인함이라는 개념을 주축으로 글을 전개하진 않을 것이다. 그저 강인함이라는 개념을 수단으로 삼아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강인함, 이것은 무엇인가. 강력함, 힘, 파워 등등 다양한 개념이 강인함이라는 것에 촉발돼 흘러나온다. 앞으로의 나의 글은 대부분이 그러하겠지만 난 스토리를, 구성하고 글을 쓰지 않는다. 그러니까 난 글의 시작을, 특정 주제는 정해놓을 거지만 이야기의 전체 틀은 잡지 않고 글을 쓴다는 것이다. 그저 사유의 바다에서, 끝을 알 수 없는 수평선 너머로 묵묵히 아름다움의 과정을 느끼며 무지의 몸짓을 할 것이다.


강인함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닌 주어진 것이다. '강인함이란 개념은 인위의 산물이고 그렇기에 우연이란 미지의 존재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강인함'이 가지고 있는 요소와 통하는 개념화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원래부터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근원적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무언가를 앎으로 전환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선 개념이 필요하고 뿐만 아니라 그 밖의 여럿의 개념과의 연결이 필요하다. 강인함의 근원에 어떠한 본질적인, 변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면, 또한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면 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그런 존재자는 인간을 뛰어넘은 존재자이기에.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개념, 그리고 언어는 표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표현은 일의적인 게 아닌 다의적이다. 본인이 얼마만큼의 지적 수준을 가졌는 가, 어떠한 욕망을 끌어내고 있는 가 등등에 따라 표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여러 표현을 비교해 보면 분명 모든 표현에 들어맞는 본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나의 내면에서 그저 소멸의 공간에 안착해 있을 뿐이다. 표현 너머, 그러니까 언어 너머는 빛이 그 힘을 내지 못한다. 표현 자체가 다의적이고 고정된 게 아니라면, 아무리 그러한 표현들을 비교한다 할지라도 소용돌이의 내부에서 어떠한 고정도 존재하지 않듯이 (설령 미약한 고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폭력적인 흐름의 폭발에 의해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표현들의 대조는 어떠한 본질도 들어내지 않는다. 그저 표현은 이야기되는 것이고 창조되는 것일 뿐이다. 의미를 생성해 내면서 말이다.


나의 글은 강인함 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룰 다른 주제도 위와 같은 규칙에 의거해 쓰일 것이다. 다시 한번 묻겠다. 강인함이란 무엇인가? 강인함은 무한한 (창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다른 모든 개념이 갖고 있는 특징이다. '무한성', 나는 이렇게 정의한다.


표현은 다양한 상황을 만나 무한히 변주되고, 그 공간엔 ‘본질로 환원’이란 입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무한히 증식해갈뿐이다. (이 실험실에서)난 강인함뿐만 아니라 모든 개념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일정 수준까지는 거부할 것이다. 사전적 정의는 조건적이지만 고정돼 있고, 그것은 강인함과 그 밖의 개념의 다양성을 온전히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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