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의 사유
인간의 본능은 미약함을 내포한다. 불안정을 내포한다. 낡음을 내포한다. 빠르게 변화, 성장하는 이 시대에 인간 본능은 뒤처져버렸다.
이성과 지성은 감응을 통해 흘러나오는 정념에 의해 제지당하고 방향잡혀진다. 또한 새로움은 회피에 의해 그 자취를 감쳐버린다. 인위를 버리고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는 것. 언뜻 들었을 땐 좋은 향기가 나지만 우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향기의 배후에 악마가 숨어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자연스러움이라는 개념을 해체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개념이 긍정의 탈을 쓴 부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이 글에서의 자연스러움은 본능의 관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자연스러움은 억지, 인위와는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저 ‘힘 들이지 않고 흘러가는 데로’를 표현할 때 우리는 자연스러움을 거기에 대입한다. 배고플 때 밥 먹고, 졸리면 자고. 이런 것들이 자연스러운 것들에 속한다. 하지만 생각을 약간만 전환해 보면 탈은 의외로 쉽게 벗겨진다. 학원에 갈 시간에 너무나 재밌는 애니메이션에 빠져서 학원에 안 간다던 지, 잠을 잘 시간에 핸드폰 속의 다양한 자극에 빠져 밤을 새우다시피 한다던가 등, 다양한 예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힘 들이지 않고 흘러가는 데로”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에겐 자연스러움은 필수적이다. - 허기에 차 밥을 먹고, 졸릴 때 자는, 그런 행위들을 생각해 보라. 하지만 - 해체를 통해 밝혀졌듯이 - 이 자연스러움 안에는 악마가 살고 있다. 어찌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있을까.
자연스러움은 인간의 생명을 죽음으로 던져지는 걸 방지하지만, 우리 인간의 다양한 측면에서의 성장 부분에선 그 기능을 긍정적이게 발휘하지 못한다. 오히려 부정적이다.
이상에서 도출됐듯이 자연스러움의 피상성질은 긍정이지만 내적성질은 부정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러움과 대비되는 억지, 인위의 성질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까?
인위(억지)는 무언가를 힘 들여서 강제적으로 한다는 느낌을 가진 개념이다. 이 삶 속에서 무언가를 강제적으로 하는 게 무엇이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선 ‘성장’의 관점에 초점을 맞추겠다) 우선 운동이 있다. 힘들지만 해야 한다. 건강한 인생을 위해. 또한 독서가 있다. 힘들지만 해야 한다. 지적인 인생을 위해. 또한 타인과의 긴밀한 '상호보완적' 관계 맺음이 필요하다. 이러한 관계는 고난의 연속일때가 많지만 정신이 무너져내리지 않고 한층 단단해지고 상승해나가기 위해선 필요한 관계이다.
위에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인위의 피상성질은 부정이지만 내적성질은 긍정이다.
자연스러움은 인간의 지적, 신체적 성장을 담보하지 않는다. 그저 본능에 충실한 것이다.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보면 성욕이 일고, 맛있는 음식에 의해 식욕이 자극받는 것을 나는 ‘자연적 증폭’이라 정의한다.
자연적 증폭은 매우 느끼기 쉬운 증폭이다. 노력과 고통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는 어떠한 질서가 있는 듯 공짜를 싫어하나 보다.
자연적 증폭은 그 사람의 인간성을 갉아먹는다(지속적인 증폭이 말이다).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의미들은 점점 상실돼 가고 그 빈 공간엔 공허가 자리 잡는다.
아까도 말했듯 세계는 공짜를 싫어한다. 그럼에도 세계는 우리 인간을 박대하진 않는 모양이다. 공허의 구렁텅이에 빠진 존재에게 ‘강제적 증폭’이라는 기회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것은 운동과 독서, 글쓰기였다. 운동은 공허의 안개를 걷어내고 태양을 불러낸다. 파괴된 지면은 태양빛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한다. 치유된 지면엔 독서와 글쓰기의 다채로움이 형상화 돼 그 지면에서 뛰어논다. 울고 웃고, 사랑하면서.
자연적 증폭과 강제적 증폭은 조화 속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개념이다. 본능을 배제하고 인간은 살아갈 수 없으면서도, 그 본능을 억제하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