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의 사유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손을 뻗는다는 것. 이 한 동작에 의해 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 따윈 없다는 것을.
어떠한 행위든 지 그와 관계하는 원인이 있다. 본능에 촉발돼 행위를 하든 원인이 목적의 탈을 쓴 채 행위를 촉발하던 지.
본능-행위는 단순 명쾌다. 본능을 촉구하는 다양한 욕구들. 이 욕구들은 강렬한 정념을 불러일으켜 행위를 목적지가 없는 항해선에 강제전이시킨다. 이러한 자연의 힘에 인간은 복종당한다.
목적-행위는 이미지를 강구한다. 그 이미지 속에 정신을 촉발시킬 강한 에너지를 주입하지 않으면 목적-행위는 작동하지 않는다.
본능-행위를 작동시키는 핵심인 본능은 우리 내면에서 활발하게 서식한다. 어떠한 의식도 필요치 않다. 반면, 목적-행위를 작동시키는 데 필요한 에너지는 전자에 비해 그다지 활발하지 않다. 나의 목적을 의식하고 ‘사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유는 성장형이다. 사물을, 현상을, 세계를 다각도로 분석해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을 넓고 깊이 있게 보게 만드는 사유란 변화를 촉진하고, 반역의 서문을 여는 열쇠이다.
하지만 사유는 순수할 수 없다. 언제나 수면 아래에 잠든 정념의 그물에 얽히고설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의 정념, 본능은 의식에 선행한다. 그에 반해 사유는 의식에 뒤따른다. 사유가 본능에 선행한다면 자유의지를 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이상과 같다. 참고로 말하지만, 난 슬픈 결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자유의지라는 저 천공의 순수한 울림이 부정된 이상,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일상에서부터, 그러니까 사적에서 공적인 부분에까지 우리의 의사소통과 다양한 행동과 선택이 본능의 감시에 묶여있는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추구할 수 있을까?
확실히 우리에겐 온전한 선택권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본능(감정, 정념) - 무의식까지도 - 의 검열을 통해서만이 이 선택권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노래를 듣는 것을 우리의 사유를 통해 효율화시키고 절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의 바탕에는 음식에 대한, 노래에 대한 욕망이, 그러니까 본능이 전제돼 있는 것이다. 이 본능이 지시하는 대상이 음식과 노래가 아닌 다른 것이었다면 역시나 사유 또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 것이다.
계속 말하지만 우리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없다. 그렇다는 건 우린 어딘가에 묶인 채 생각을 하고 선택을 한다는 것이고 이 사실은 충분히 인간의 공허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그렇지만 정말 그런 걸까? 정말로 자유의지의 부제는 인간의 공허를 자극하는 걸까?
공허는 사유하는 자에게만 찾아온다. 사유하지 않는 자에게는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세계는 일정하게 다가오고, 일정하게 지나간다. 세계란 매듭을 풀려 손을 쳐들지만, 금세 손은, 축 쳐진다.
사유하는 자는 세계를 인위적으로 조작한다. 세계의 형태를 분석해 특정 원리를 찾아내고 배치를 달리해 세계를 재창조한다. 창조는 새로움이요, 새로움은 신선한 쾌락을 선사한다. 그러나 쾌락의 이면엔 언제나 고통이 있다. 그저 상황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질 뿐.
(어떠한 수단을 통해서든) 사유하는 자는 자신의 언어 한계를 인지할 가능성이 있다. 그 순간 언어를 통한 인위화에 권태감을 느끼고 그것이 심해져 삶에 대한 공허까지 치달을 수 있는 것이다. - 물론 공허감을 느끼는 원인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하지만 이것은 한계가 아니라 일종의 경계로 극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는 공허에 선행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본인의 언어를, 그러니까 사유를 경계를 넘어 새로운 더 상위의 지평으로 이행시킴에 따라 공허를 극복할 수 있다. - 육체와 운동에 관한 이야기는 생략하겠다.
나는 앞에서 자유의지의 부제에 의해서 공허의 감정이 생겨날 수 있다고 했지만 설령 생겨나도 괜찮다. 사유의 전환-이행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린 자유의지의 부제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생각보다 정신적 고통은 공허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세계의 다채로움이 메말라갈 때 말이다. 즉 우리에게 있어서 정신적 고통은 공허와 떼려야 뗄 수 없고 결국 공허와 함께 사유에 후행한다. 사유를 통해 컨트롤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유의지의 부제. 다소 부정적이게 들리지만 이 부제가 우리의 정신을 무너뜨리지 않는 게 드러난 이상, 이렇게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우리는 강한 본능에 의해 자유의지를 빼앗겼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세상은 열려있고 미지의 것투성이다. 그렇기에 본능 또한 사유와 함께 동행하는 게 뭐 그리 큰 대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