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함, 흔들림

실험적 글쓰기 - 3

by 이상우

완전함을 추구한다는 말에는 결핍이 있지만 그 결핍은 너무나도 다양하다. 그럼에도 굳이 그 다양함을 환원하자면 나오는 것은 - 말장난 같겠지만 - 불완전함이다. 불완전함은 ‘관계 맺음’ 속에서 그 존재를 들어낸다. 즉자와 대자의 순환 속에서 불완전함이 현시되며 즉자로의 되돌아옴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식한다. 즉자는 포만적이다. 순간적인 욕망의 또는 감각의 충족에 의해 포만 상태로 존재하는 즉자, 그는 자신을 넘어서지 않는다. 어떠한 사물도 마주하지 못한 채 충족 상태에서 지속하며 감각의 범위를 축소시킨다. 그는 불완전함을 알지 못한 채 그저 동일성 속에 현존한다. 여기서 말하는 동일성은 욕망, 또는 감각이 - 일시적으로 - 충족된 상태의 성질을 의미한다. 부족은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충족의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늘리기 위해, 다양함을 인지한 채 다방면으로 나아가지만, 이와는 반대로 충족은 포만적이며 세계의 다양함을 보기에는 너무나도 꽉 막혀있으며 채워져 있다. 너무나도 많은 음식물을 섭취한 사람에게 어떠한 음식물을 제시한다 할지라도 그런 극도의 포만감, 배부름으로 꽉 채워진 존재에게 있어서 음식의 다양성은 소거되며 그 음식은 ‘배부르니까 피해야 할 것’으로 동일화된다. 그것이 어떠한 음식이라 할지라도. 다른 예시를 들어보자.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이 어느 순간, 극도의, 삶이 허무해지고 모든 것을 잃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되는 그 순간, 고통의 역치가 최고조에 이르며 고통이 충족된 그 순간, 삶은 고통과 동일화된다. 고통이 팽창하며 충족된 그 상태, 위장이 팽창하며 충족된 그 상태에서 다양성은 동일성의 가면을 뒤집어쓴다.

즉자는 분명 포만적이지만 즉자로의 ‘되돌아옴’ 속에는 동일성만 내재하진 않는다. 분명 그 안엔 자아의 지층을 뒤틀고, 분리시키고 다시 재조립하는 그런 흔들림 또한 내재하고 있다. 동일성에 의한 포만감은 적응자적 자아를 폭주시켜 치우치게 만들지만 절대로 공통성의 범주에서 벗어나진 않는다. 즉 적응자적 자아의 작동에 간접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할지라도 그 작동 자체를 중단시킬 순 없는 것이다. 극도로 충족된 적응자적 자아의 지층에 현존하는 주체는 무력하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다. 하지만 그와는 다른 심급에 현존하는 존재 - 하지만 근원적으론 같은 존재 - 인 또 다른 주체는 소수자적 자아의 지층 위에서 그 무력한 인간을 바라본다. 그 바라봄은 물리적인 바라봄은 물론 아닐 것이다. 그저 내면적 작용이고, 겉으로도 드러나지 않지만, 그 다른 주체는 분명 무력한 주체의 흔들림을 인식한다.

인식은 실행을 현실화시키진 않지만 가능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흔들림은 - 흔들림을 인식하고 감각하는 것은 - 필연적으로 그에게 ‘머무름’을 제시한다. 계속해서 변화하고 생성되는 세계 속에서 머무른다는 것, 진실되게 머무른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닐 것이다. 즉자와 대자의 순환과 흐름의 역학 속에서 그저 빨려 들어가 있었던 나를 온전히 마주한다는 것. 온전히 한 곳에 머물러있다는 것은 내 삶의 새로운 국면을 마주하는 것이고, 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세계의 순환과 흐름을 직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아름다움이 무한한 그 자신의 이미지를 생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흔들림은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것이다.

대자는 배고픈 노예와도 같다. 그에겐 어떠한 취향도, 기질도, 성향도 반영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배를 채울 수만 있다면, 그 후에 어떠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신경 쓴다는 것은 진정으로 배고픈 노예에게 있어선 사치이고 무가치한 일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다양함을 보려는 것도 그저 욕망을 채우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즉자와 대자는 순환이지만 긍정적인 의미로서의 순환이 아닌 노예로서의 반동적인 순환이다. 그것은 일상성을 품은 순환이며 자연적 증폭이 속한 영역에 내재해 있다. 사실 우리의 적극성은 순환의 흐름에 온전히 종속되고 포섭될 수 없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반동적인, 즉자와 대자의 순환의 흐름에 말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우리는 수동적인 것과 능동적인 것을 엄밀하게 구분할 순 없을 것이다. 그 두 개념은 근원적으론 본능이라는 동일한 성질의 작동이기 때문이다. 반동성과 적극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난 반동성을 노예의 것으로 치부했지만 사실 이 두 가지 요소 모두 본능의 성질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둘을 구별한다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분명 이 두 개념은 같은 근원을 공유하지만 그 작동방식엔 차이가 있으며 그 과정에서 이 차이는 인간의 피상성을 통해 압도적인 두 개념 사이의 실제적 거리감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자연적 증폭을 통해 대자와 즉자의 순환의 고리가 돌아가며, 적극성은 그 순환의 틈에서 그 고리를 조형한다. 반동성은 순환의 고리이며 적극성은 그 사이의 틈에 현존하는 잠에 든 창조자로서 인위적, 강제적 증폭을 통해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다. 흔들린다는 것은 창조자를 깨운다는 것이고, 머무르고 바라본다는 것은 그가 조형력을 구사하는 중이라는 것이며, 아름다움은 그의 창조물이자, 그것의 효과이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불완전함 속에 있으며 결핍을 품에 안은 채 환히 웃으며 삶을 긍정하는 자이기도 하다.

예쁘고 잘생긴 인간, 맛있는 음식, 귀여운 강아지 등등, 그 외관이 뛰어나며 우리의 감각을 환하게 만들어주는 것들. 그들을 피상적으로가 아닌, 사유를 통해, 뿐만 아니라 우연성을 통해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면, 그것들의 원인에 원인을 거듭해 올라간다면 어찌 그들에게 나약함이, 역겨움이, 추잡함이 완전히 결여돼 있을 수 있겠는가. 글쓰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문장을 써내기 위해 노력하고 하나의 방대한 이야기를 구축하기 위해 나아간다 하더라도 결국 그 근원엔 본능과 욕망과 같은 반동성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야기를 전개하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삶을 유지시키기 위해 본능은 우리에게 피상성을 주입했으며, 그 추잡함을 보이지 않게 해주는 가림막을 선물해 줬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가림막은 꽤나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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